W. 소로애

KPC, 어째서 주인공을 죽인 건가요?

둔탁한 소리. 방금 부러진 것은 무엇이고. 방금 터진 건 무엇인가요. 옥상 난간 너머로 주인공을 밀어버린 KPC가 이쪽을 바라봅니다. 저 밑바닥에서는 비명이 울려 퍼지고. 핏물이 콘크리트 바닥 위로 퍼져나가는데도. 내려다보지도 않고서 당신을 바라봅니다. 단정한 얼굴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고. 친구 역할의 엑스트라인 당신을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PC, 이번 방학에는 뭘 하고 싶어?"

GM
위림
PC
양사비의
2023-03-05
KPC, 어째서 주인공을 죽인 건가요?
W. 소로애
Chapter 1. 봄이 돌아오는 날
무언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멘트와 비교적 무른 형체가 부딪쳐서 짓뭉개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차에 들이박는 걸 가정할까요.
하지만 분명 그것은 쓸데없는 행위일 겁니다.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잘 알고 있지 않나요?
두 팔을 허우적거리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가 들리고…
추락.
그로부터 딱 3초가 지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지금쯤이면 수줍게 두 뺨을 붉혀야 했을 주인공은 저 밑바닥에 있습니다.
그래요, 주인공이 죽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세상의 장르는 사랑으로 시작하며 행복한 엔딩을 맞는 로맨스가 아니었나요?
분명 그랬을 텐데… 한순간에 세상을 이루는 전제가 사라졌습니다.
사랑이 시작하기는 커녕 회색 길 위로 붉은 핏물이 번져갑니다.
범인이 눈앞에 있습니다.
위림:비의야.
위림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 매우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세상이 골라내고 또 골라낸 존재라는 것이 합당할 만큼,
언제나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채······.
위림:이번 방학에는 뭘 하고 싶어?
사랑을 시작했어야 할 대상을 난간 밖으로 밀어버렸고, 그것을 들켜버렸는데도 담담한 어조로 말합니다.
비의, 심리학 판정!
양사비의:
심리학
기준치: 55/27/11
굴림: 92
판정결과: 실패
위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명확한 것을 읽어내기엔 상황으로 인한 아연함이 컸던 걸까요.
단 한가지 사실만이 틀어박힙니다.
위림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비의, ◼◼◼ 1D5 상승합니다!
양사비의:2
이건 정상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건 연애를 위한 게임입니다.
마침내 사랑을 이루어서 가장 행복해질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이 순간마저도 한없이 매력적인 당신의 친구는 평범하였던 당신의 삶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위험과 같습니다.
뜻밖의 상황을 마주한 비의, 이성 판정 0/1!
양사비의:
SAN Roll
기준치: 80/40/16
굴림: 34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성 감소 없습니다!
양사비의:……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떠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 없다. 사이렌 소리가 들리나? 그게 아니면 비명 소리라든가. 입술만 달싹이다가 의문을 담아 묻는다.) 이게, 지금…… 다 뭐야?
위림:다 설명해야 해? (마주 눈을 슴벅인다. 옥상 밑에서 들리는 비명이 날카롭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나는 너랑 방학에 뭘 할지 얘기하고 싶은데.
양사비의:그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곧장 상대방을 스쳐지나가 난간을 잡았다. 몸을 아래로 기울여 상황을 직접 목격하려 한다. 정말 죽었어? '주인공'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그렇게 죽어버리면 안 될 텐데…….)
옥상 밑을 보면… 처참한 모습의 주인공이 보입니다.
교실의 창문마다 고개를 내밀었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콘크리트를 타고 올라옵니다.
운동장에 전교생이 나와 조례를 서기라도 하는 것처럼, 딱 그만큼 소란스럽습니다.
위림:중요한 건 그거밖에 없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저지르지 않은 듯한 무구한 얼굴로 웃는다.) 신경 쓰지 마.
양사비의:아니, 중요해. 왜냐면…… (인과가 제대로 맞붙지 못한다. 채 다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 ─정말 파악하지 못했나?─ 혼란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왜냐면, 쟤는, 주인공이잖아. 쟤가 있어야 너도 사랑에 빠지고, 행복해지고.
그런 거 아니야?
위림:무슨 소릴 하는 거야, 주인공이라니. (고개를 기울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뭐, 우리 학교의 유명인사, 그런 거라면 이해하겠지만…
(그러다가도 손을 내저으며 다시 가볍게 소성을 흘린다.) 쟤가 있어야 내가 행복하다니, 잠 덜 깬 거 아니지?
양사비의:(난간 아래를 쳐다보던 몸을 돌려 너를 바로 본다. 대화는 계속 평행을 달린다. 적어도 지금 당장 저 애는 자신의 장단에 맞추어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미간을 잠시 좁혔다 풀어냈다.) 왜 그랬어? 왜…… 밀어버린거야.
위림:(돌아오는 답은 명료하다.) 싫어서.
옥상 난간에 서 있길래 장난삼아 툭 친 거야. 이렇게 떨어질 줄은 몰랐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만다.)
아연함을 느낄 법도 한데, 위림은 오히려 한 걸음을 다가옵니다.
그렇게 두 걸음, 세 걸음.
신발 사이에 한 뼘을 남겨둔 채로 호흡합니다.
위림:그래서, 이제 내가 싫어?
더없이 천진하게, 발목을 잡고 이성을 끌어내듯이 위림이 속삭입니다.
마치 당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림:어차피 내일은 방학식인데……
나랑 도망갈래?
발칙하고 불온한 제안을 꺼냅니다.
단언컨대 이 세상에서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매력적이고, 아름답다고 인정받은 대상이……
다름 아닌, 조명 한 번 받지 못하는 엑스트라인 당신에게.
어쩌면 경찰을 부르는 게 당연할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 학생을 밀어 버린 사람이 있다고.
다음으로는 주인공이 병원에서 깨어난다는 극적인 상황을 기대하고, 다른 공략 캐릭터와 문병 데이트를 하고……
그 사이에 당신은 다시 평범하게 지내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충동도 일지 않나요?
이탈해보고 싶다. 정해진 레일에서 빗나간 듯 달려보고 싶다.
나도 엑스트라가 아닌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교실 옆 자리에 앉아있던 동급생에게 느낄 생각은 아니었고, 살인자로부터 얻을 충동은 더더욱 아닐 테지만.
어떻게 할까요?
양사비의:도망, 어디로? 갈 곳은 있어? (여기는 세계가 아니고 좁디좁은 게임 속이다. 뒤로 반 발자국만 물러서면 난간이 등허리를 누른다. 그래서 더 뒤로 물러나지 못했다.)
위림:네가 가고 싶다고 하면 어디든지 갈 거야.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알기에 이 이상 다가서지 않는다.) 같이 갈래?
양사비의:나는…… (말끝이 사그라든다.) 너만큼 특별한 사람이 못 돼. 상상력도 부족해서 내가 어디를 가고싶은지도 모르겠어.
같이 도망을 친대도 나는 우리 집에 가자는 말 밖에 못해. 그 정도로 재미없고 특별하지도 않아. …… (시선을 밑으로 내린다. 말을 이어갈 수록 체감하는 것은 '너는 나를 위해 예비된 것이 아니'라는 은근한 확신 뿐이다.)
위림:나는 특별할 게 뭐가 있고 네가 특별하지 않을 건 또 뭐가 있어? 지금 나한텐 네가 제일 특별해. (짧게 잘린 흰 머리칼을 손끝으로 지분거린다. 명백한 호의가 묻어나는 손길이다.)
그럼 응, 아니로 대답해. 나랑 같이 가고 싶어?
양사비의:(숨을 짧게 들이킨다. 모르겠다. 나는 행복해지는 너를 바라보면서, 그 곁에만 서도 행복한 사람이라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조연에게는 조연에게 할당된 몫이 응당 존재하지 않는가.) ……하나만 더 묻게 해줘.
만약 내가 거절하면 넌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위림:나랑 같이 가주지 않은 널 원망할 거야. (악의마저도 느껴질 법한 말이지만, 목소리와 표정엔 그 어떤 그림자도 없다. 오히려 무게감이 없어 진심과 농의 경계가 모호하다.)
양사비의:그렇다면……
나는 안 갈래. (몸을 한껏 뒤로 붙이고 발끝을 조심히 든다. 자칫하면 저 역시 떨어질 것처럼 아슬한 자세가 된다.)
혼자 가. 경찰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할게. 차라리 내가 밀었다고 할게.
위림:그래? 그럼……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고개를 천천히 기울인다.)
양사비의:그게 무슨 소리야?
위림:(능숙하게 난간 위에 걸터앉는다. 여유로운 발재간과는 달리 까딱하면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다.) 내가 너 원망할 거라고 했잖아.
양사비의:아냐, 안 돼. 하지 마! (다급하게 네 손목을 잡아채려 한다.)
위림:(순순히 붙잡힌다.) 이제 나랑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양사비의:갈, 게. 갈 테니까 그러지마. 내려와. 위험하단 말이야.
위림:(그 말에 폴짝 뛰어 난간에서 내려온다.) 이래야 내 친구지.
비의, 관찰 판정!
양사비의: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42
판정결과: 보통 성공
위림이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군요. 무척 기쁜 것 같습니다.
눈동자에 들어찬 다정이 만일 물이었다면, 진작 온 세상이 잠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의, ◼◼◼ 1D10 상승합니다!
양사비의:10
더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는 걸까요? 위림은 당신의 손을 잡았습니다.
계단으로 이끄는 걸음은 거의 경쾌하기까지 합니다.
남은 수업은 어떡하지? 가방을 가지러 가야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지만 미뤄둡시다.
어차피 봄 방학은 일주일조차 아닌 시간입니다. 가방은 무조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위림도 교실까지 돌아갈 생각은 없는지 말합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는 내내 유쾌한 기색입니다.
위림:학교 밖으로 나가자. 어차피 내일은 방학식이고…
경찰도 바로 알아내긴 어려울걸. 그러니까 개학할 때까지 내내 널 성가시게 할 거야.
방학에는 뭘 하고 싶어? 나는 너랑 같이 놀이동산도 가고 싶고… 너 뜨개질하는 거 구경도 하고 싶어.
양사비의:나는…… (주인공이 사라진 세계는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가 아는 한에서 이 세상은 오로지 그 사람을 위해서 조성된 거대한 피조물이다.) 모르겠어. 네가 경찰에 잡혀가지 않는다면 뭐든 좋아. ...
놀이, 동산은…… 위험할 것 같아. 뜨개질 구경은 괜찮아.
밤중에 돌아다니는 건 그렇게 위험하지 않을 테니까, 공원에서 별 보는 것 정도야……. (말끝이 흐려진다.)
위림:하하, 바보. (짧은 소성, 그러나 기쁜 기색이 분명하다. 참 너 다운 대답이라고 해야 하나. 오히려 그래서 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복도를 울립니다.
보폭은 서두르지도 않고, 머뭇거리지도 않습니다. 경쾌한 걸음입니다.
누군가 본다면 여유롭게 하교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마주 잡은 손이 은근하게 따뜻합니다.
정말 이 손으로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그때, 위림이 바로 옆의 미닫이 문을 열더니 당신을 끌어당깁니다.
안은… 비어있는 교실입니다. 체육 수업을 하러 나갔는지 자리마다 교복이 놓여있습니다.
위림:(바로 등 뒤의 문을 닫는다. 그리고선 검지를 입술 앞에 대고.) 쉿. 수업 중이니까… 들키면 안 돼.
비의, 듣기 판정!
양사비의: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70
판정결과: 실패
(상황을 읽을 줄 모르고 눈치도 없는 심장이 순간 두근거린다.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
(웅성임인지 울렁임인지 모를 것이 지나간 한참 뒤에 속삭인다.) 여기는 왜?
위림에게 묻기가 무섭게 복도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중후한 느낌이 있는 걸 보니 교사인 모양입니다.
"······죽었다면서. 하필이면······. 자살인가?"
"그건 ······그 녀석이······ 없지. 그게 당연······."
"·····그렇지. ······하기는 하지."
닫힌 문 너머로 웅성거리던 소리가 넘어온 탓일까요? 대화의 일부만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귀를 재차 기울이기도 전에 그들은 순식간에 멀어집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걸까요.
그래도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시체가 교내의 화제가 된 것.
비어있는 교실, 단 둘만의 일탈, 나란히 선 두 사람…
상황적으로만 본다면 더할나위없는 청춘의 한 페이지인데도, 상황은 이리도 다르군요.
창문 밖으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학생들도 있었는지 짧은 비명이 반복됩니다.
체육 시간이 끝나서 이제 본 모양입니다.
언제 쉬는 시간 종이 쳤던가요? 정신이 없는 겨를에 듣지 못했나 봅니다.
혹은 얼굴이 가까웠던 순간에, 머릿속에 울리는 종소리라고 스스로 착각을 했던가.
위림:이제 다 지나간 것 같은데… 갈까?
양사비의:(잠깐 숨으려고 이곳에 온 거구나. 기가 막혀서 대답을 뱉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고개만 주억인다.)
하긴, 이대로 여기에 머무를수도 없죠. 곧 학생들이 들어설 테니까요.
당신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위림은 등 뒤의 문을 열고, 부드럽게 당신의 손을 잡아서 이끕니다.
먼저 한 걸음을 앞서 걷는 걸 보니 하교길 경로는 이미 정해둔 모양입니다.
이쪽 길로 가는 거면… 교문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 건물 뒤편의 후문을 향하는 것 같습니다.
위림:이 시간에 나오는 건 처음이지? 원래 남들 공부할 때 놀러다니는 건데, 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양사비의:…그거야 그렇지. 굳이 놀러나갈 생각도 안 했어. 학교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잠깐 단어를 고른다.) 즐거웠거든.
위림:학교가 즐겁다니, 참 네가 할 법한 얘기면서도… 진작 너 데리고 해볼 걸 그랬다 싶다. 분명 재밌었을 텐데. (목소리에서 작은 아쉬움이 묻어난다.) 이 시간에 밖에 나가면 얼마나 좋은데. 놀 시간 많고.
양사비의:(흘긋 눈치를 본다.) 이상한 소리 하나 할래.
위림:(눈에 총기가 돈다.) 무슨 소리?
양사비의:바깥에 뛰쳐나가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애들이나 하는 거야.
나는 평범해서 못 했어.
위림:(마주본 시선에 흐릿한 것이 끼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곧장 눈을 접어 웃는다.) 그럼 이제부터 나랑 안 평범한 거 하면… 너도 안 평범해지겠네. 그치?
양사비의:(그 웃음을 보면 괜히 또 어깨나 굳히고 만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돼지 목에 진주목걸아…… 같은 게 되는 거 아냐?
위림:어쨌든, 목걸이는 목에 걸었으니까 그걸로 된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뻔뻔하게 한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만들래. 맨날 심심하게 살면 재미없잖아. 세상에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양사비의:(주변을 둘러본다. 이렇게 밝은 낮에 들리는 발소리는 오로지 두 사람 몫 뿐이다.) 너한테 있어서 즐거운 일은 어떤 건데?
위림:흠, 보통은 그냥 내키는 걸 하지. 땡땡이 치기, 학교 안 가고 놀러다니기, 낮잠자기… 그런 거. 얼마 전엔 학교 땡땡이 치고 놀러 나갔다가 맛있는 디저트 집을 찾았어.
양사비의:(어쩐지 그 사람과 너의 '행복한 이벤트'를 위해 준비된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개학할 때까지는, 그렇게 즐거운 일이 뭔지 찾으면서 보내게 되는 건가.
(심장이 빠르게 뛴다. 설렘이 아니라 공포다. 림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결국 주인공의 죽음 위에 세워진 나날들이다. 때문에 낯이 창백해진다.)
위림:그럴지도 모르지. 이참에 네가 모르는 즐거운 일들이 세상에 이만큼 있다는 걸 알려주게 되겠네. (여유로운 걸음걸이, 느긋한 말투. 영락없는 일상의 것이다. 여태 일어난 그 모든 일이 남의 일인 것처럼…. 와중에 비의를 향한 호감마저도 묻어난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요? 점점 등골이 서늘해진다고 생각하던 때에……
뒤쪽에서 대뜸 고함이 들려옵니다.
학주: 이 녀석들, 빨리 학교로 안 돌아가!? 어디서 땡땡이야! 몇 학년 몇 반이냐!
수업이 없을 때마다 학교를 한 바퀴씩 돌던,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학주입니다.
후문에 제법 가까워졌는데… 타이밍 좋게 딱 들켰네요.
늘상 들고 다니는 나무 몽둥이까지 함께입니다. 걸리면 매질은 피하지 못하겠군요.
위림은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씩 웃으며 당신의 손을 꽉 잡습니다.
위림:셋 세고 뛸 거야.
하나, 둘…
셋!
그대로 후문 바깥을 향해 재빨리 뛰어나갑니다.
비의, 민첩 판정!
양사비의:
민첩
기준치: 70/35/14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붙잡힌 손에 끌려갈 때 다리가 엉키지 않도록 열심히 뛰어간다. 여전히 모르겠다. 내가 네 손을 잡고 달려도 될 자격이 있나?)
속도를 맞춰주는 건지, 따라잡기 어렵지 않습니다.
어느새 위림과 발을 맞춰 뛰고 있습니다.
새파란 하늘이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이른 봄바람이 기분 좋게 등을 밀어줍니다.
걸음마다 따라붙는 불안은 어쩔 수 없지만요.
뒤쪽에서 '야! 너희 어디 가! 빨리 돌아오지 못해!' 하고 고함이 메아리쳐도 위림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학교 바깥으로 달려나가다가, 문득 이상한 기운에 뒤를 돌아보면…
몽둥이를 꽉 쥔 학주가 집까지 따라올 기세로 쫓아오고 있습니다!
위림은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 여유로운 태도로 당신을 이끌며 달려나갑니다.
큰 길가를 따라 이리저리 달리던 것도 잠시, 돌연 한 명도 지나가기 힘든 비좁은 골목으로 방향을 틉니다.
사실, 골목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곳입니다. 건물 사이에 있는 좁은 공간에 가까우니까요.
당신을 낚아채듯 품에 가볍게 안으며, 틈 안쪽으로 몸을 피합니다.
쉼없이 달려온 탓에 달은 온기와 들뜬 호흡이 맞닿습니다.
위림:미안, 오늘 자주 이러네. 좁아도 참아줄 거지? 스릴을 즐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들릴 듯 말 듯, 소근거린다. 입을 다물며 짓궂게 웃는다.)
양사비의:(내게 정해진 역할과 용도를 벗어나는 이 모든 순간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런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발을 디딜 때마다 누가 내 발목을 붙잡고 밑으로 끌어내는 건 아닌지 두렵다며, 있는 속내를 전부 쏟아내고 싶어진다. 그 모든 말 대신에 숨만 헐떡거렸다.) …….
(좁은 공간에서 네가 느껴진다. 이 품은 날 위한 게 아닌데도. 그런데도 내게 네가 느껴졌다.) 나 무서워.
위림:괜찮아, 저러다가 금방 돌아가. (머리 위로 턱, 손을 얹고는 그대로 쓸어내린다. 네 두려움을 덜어내기 위한 행위다.) 내가 몇 번 들켜봤는데도, 안 보이면 씩씩대다가 가더라고. (네 공포가 우릴 쫓아오는 이에게서 비롯된 것이리라 확신하는 말투였다.)
양사비의:아니, 그게 아니라…… (입술을 잠깐 벙긋거린다.)
이런 일이 다 처음이라서 정말 모르겠어. (고개를 들어 올려본다. 그늘에 끼인 보랏빛 눈동자가 보였다.)
이 다음은 어떻게 하는 게, 좋아?
위림:(티끌 하나 묻지 않은 흰 눈동자를 보다 보면, 이상한 충동이 든다. 말도 안 되는 뻔하고, 우습고, 지리멸렬한 얘기를 꺼내고 싶어진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다. 평소의 미소를 보인다.) 망 보다가 갈 테니까, 이 앞으로 쭉 걸어가. 아마 익숙한 골목일 거야.
무서우면 내가 먼저 앞장서고.
양사비의:(슬쩍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본다. 방금 전처럼 소란스러운 기색이 없으면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먼저 가. ……따라갈래.
작게 고개를 끄덕인 위림은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려는 듯, 밖을 살펴봅니다.
우리를 찾는 학주의 고함 소리는 어느덧 멀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선택을 받은 존재와 함께하는 이 상황이 비현실적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지만요.
확인을 마친 위림이 앞장 서서 틈새를 따라 걷습니다.
그 뒤를 따라 걸어 밖으로 빠져나오면… 이제는 골목이라 칭할 만한 길입니다.
하교할 때 종종 다녔던 골목이군요.
위림은 혹여 학주가 다른 길로 쫓아오기라도 하나, 앞뒤를 몇 번 더 살핀 뒤에야 안도의 숨을 뱉어냅니다.
그 자리에 서서 당신을 가만 바라보던 위림이 돌연 웃음을 터뜨립니다.
위림:그래도 재밌었다, 그치?
양사비의:…….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너를 본다.)
재미, 모르겠어.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옅은 울상에 가까웠다.) 쫓기는 건 재밌는 거야?
무서웠던 건 재밌는 게 아니야. (그런 소리를 하면서 골목길을 걸었다.)
위림:(그 표정에 웃고 있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온다. 먼저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다가, 보폭이 더 멀어지기 전에 서둘러 따라잡는다.) 난 스릴있는 게 좋아서 재밌어할 줄 알았는데… 너한텐 별로 안 맞았나보다.
(네 손을 조심스레, 그러나 어딘가 애원하듯 붙잡는다. 비어있는 손이 싫다.) ……기분 많이 상한 건 아니지? 우는 것도 아니구?
양사비의:당연히 기분 상한 건 아니야. (잡힌 손끝을 조심스레 움츠린다. 꼭 맞잡는 모양새가 되는 것처럼.) 그냥…… 내가 생각보다 더 걱정도 많고 불안함도 많은 사람이었나봐. 처음 겪는 일탈이라고 심장 뛰는 게 안 멈추는 걸 보면.
이제 어디로 가? 네가 얘기했던…… 그 디저트 가게로 가는 거야? 아니면 우리 집으로 가서 뜨개질 구경을 하려나. …
위림:다행이다. 앞으론 좀 정적인 걸로 골라볼게. (그제서야 다시 웃어 보인다. 온기를 놓고 싶지 않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둘 다 땡. 아니지, 맨 뒤는 반 정도 맞았어.
이대로 너네 집까지 갈 거야. 그리고 배웅해주고 나도 집에 가야지.
심장 벌렁거리는데 쉬어야지. 안 하던 거 해서 놀랐을 텐데. (익숙하게 네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높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세가 삐딱해진다.)
양사비의:……. (무게를 받아내느라 잠깐 몸이 뻣뻣해진다.)
오늘은…… 그렇게 끝이야? (집에 돌아가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헤아려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이상 아무런 일도 없는 봄방학을 그렸다. 림은 봄방학 동안 나를 찾지 않는다. 나는 조연의 본분에 충실해진다. 그렇게 개학을 맞이하고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더없이 완벽한 계획이다.)
그러면 내일은? (그러한 희망의 티끌 한 조각을 담아 물었다.)
위림:응. 사실 이대로 시가지 가서 같이 쇼핑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그냥 집으로 보내주는 편이 나도 속 편할 것 같아.
내일은… 흠, 글쎄. 너랑…… (곧장 답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마땅히 계획해둔 건 없었던 모양이다.) 어디든 갈래. 어디 갈지는 집에 가서 고민할 거야.
양사비의:(네 목소리에 마침표가 찍어지는 순간, 나는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깨닫는다. 너와 이렇게 나누는 시답잖은 대화들이 좋다. 우리의 관계가 아주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시시껄렁하게나마 존재한다는 사실이 좋다. 그래서 네가 나를 지금처럼 아끼는 게 벅차서 힘들다.) …….
바보. (툭 내뱉었다. 잡은 손을 꼼지락거린다.) 집이나 가자.
위림:응. (맞잡은 손이 꼼지락거리며 손등을 스치면, 간지러워, 하고 짧게 웃는다. 몇 번이나 걸었던 식상한 길인데도 네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특별한 길이 된다. 거창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함께한다는 것엔 그런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네 속내도 모르고,) 너랑 있어서 좋아. (무구한 소리나 내뱉는다.)
양사비의:…….
난 너한테 살갑지도 않은데?
위림:그래도 좋아.
안 살가워도 너니까.
양사비의:너, 사람 보는 눈 꽝이야.
위림:아무렴 어때, 이러나 저러나 너랑 있는 게 좋은 건 똑같은데.
남이 뭐라 그래도 난 좋아.
양사비의:(불현듯 목구멍에 말이 걸린다. '그 애는 죽일 정도로 싫어했던거야?'─차마 뱉을 수 없는 것이라, 가볍게 기침만 했다.)
(빈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꼭 건조한 봄바람이 목안을 간질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시늉을 하며 몇 번 기침을 한다.)
…… (조금 잠긴 목소리가 됐다.) 희한한 애라니까.
학교 다니는 애한테 물어보면 나만큼 겉도는 애도 없다고 할 텐데, 그런 애한테 하필 시선을 주고…….
위림:하하,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알잖아, 나 틀에 박힌 거 싫어하는 거. 그러니까 네가 눈에 띄지.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웃음기 섞인 어조로 말을 잇는다.)
그나저나… 감기 든 건 아니지? 봄이라 따뜻하다지만 바람은 아직 좀 찬데.
양사비의:집 들어가서 따뜻한 물 마실게. 감기는 아니야. (그렇게 걷다보니 제법 걸어온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보폭의 수만큼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짓밟은 셈이 된다. 그것을 되새길 때마다 공포가 스멀스멀 번져서 빨리 집에 들어가고픈 기분이 들었다.)
등 뒤로는 사람이 죽었다는 혼란이 떠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서 유리되기라도 한듯 위림은 정작 들뜬 걸음을 이어갑니다.
주인공은 위림에게 가장 완벽한 짝이 되어줄 수 있었을 겁니다. 세상에게 선택받은 만큼의 풍요를 누리면서요.
물론, 위림에 비해 부족하기는 했지만… 주인공과 위림이 이어지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을 겁니다.
위림은 스스로 운명을 잘라내 버린 것이나 다름없을 텐데, 여전히 평안한 얼굴입니다.
비의, 위림이 어떻게 보이고 있나요?
관찰 판정!
양사비의: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2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그 순간, 위림은 당신의 손을 놓더니 한 걸음을 더 나아갑니다.
사방으로 벚꽃이 일렁이고, 떨어져내리는 꽃잎마저도 마치 이 순간을 치장하는 듯합니다.
분명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너무나도 짧은 찰나의 봄.
위림은 고개를 돌리더니 오직 당신을 바라봅니다. 마치 옥상에 있을 때처럼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저 웃음이 그저 묵인하기 위한 동조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오히려 마음이 복잡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언제나 위림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았나요?
입학을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비의, ◼◼◼ 1D10 상승합니다!
양사비의:6
6 상승합니다!
위림:자, 집에 다 왔다. 흰색 지붕 집.
아, 그러고 보니… 벌써 도착했네요.
흰색 지붕과 대문의 창살 너머로 보이는 잔디, 마당 한 구석에 심어진 노란 꽃. 어느덧 집에 도착했습니다.
위림과는 입학했을 때부터 등교를 같이 했으니, 집으로 향하는 길을 잘 알고 있을 만도 하죠.
위림은 한 손을 들어 흔듭니다.
방학식에는 아예 가지 말자고 했던 게 진심이었던 건지, 태연스럽게 말합니다.
위림:내일 봐, 비의야.
양사비의:…….
(얼굴에 홀린 기분이다. 넋을 놓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려 손을 가볍게 들고 흔든다.)
당신의 인사를 받은 위림이 골목 끝으로 걸어갑니다.
유난히 피곤하고 몸이 무거운 것 같습니다. 서둘러 집으로 들어갑시다.
양사비의:(사라지는 등을 바라보다가, 저 역시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간다. 이상하네. 꼭 아무런 일도 없이 돌아온 것만 같다.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한계까지 긴장하다가 막 풀어진 몸이었으니, 부풀어 오른 풍선의 바람이 빠져나간 것처럼 온몸이 느슨합니다.
무슨 일인지, 당장 침대 위로 드러눕고 싶어집니다. 밀린 집안일이 있지만… 지금 더 급한 건 수면입니다.
집안일이야, 내일 좀 더 일찍 일어나서 하면 됩니다. 2층에 있는 당신의 방으로 올라갑시다.
양사비의:(왠지는 모르겠지만 눈꺼풀이 미친듯이 무겁다. 겉옷을 벗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면 화장실과 당신의 방이 있는 짧은 복도가 있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익숙한 풍경입니다.
침대와 책장을 비롯한 친근한 가구들에게서 비롯되는 평온함이 있습니다.
이제야 일상으로 되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지 않나요?
아마도 얼떨결에 땡땡이를 치고, 학교에 책가방을 두고 왔다는 이유만은 아닐 거예요.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주인공이 위림의 손에.
혹시나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옥상에서 떨어졌으니 크게 다쳤을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가······.
이런 생각을 말한다고 해서 누가 이해할까요. 오히려 미쳤냐는 소리만 들을 게 뻔합니다.
아, 서서히 졸음이 밀려듭니다.
이대로 두 눈을 감고서 잠드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겁니다. 몹시 피곤한 하루였으니까요.
양사비의:(겉옷을 대충 바닥에 떨어뜨려놓고, 그대로 침대에 드러눕는다. 아, 옷도 안 갈아입었는데. 씻지도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은 전부 졸음 아래로 가라앉는다.) …….
두 눈꺼풀을 내리감으면, 시선과 감정으로 인해 불규칙하던 호흡이 서서히 규칙을 되찾아갑니다.
온몸을 푹신한 매트리스와 이불 위에 맡겨두고 있다보면… 어느덧 잠에 빠져듭니다.
... ...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한 풍경이 보입니다.
두 눈을 뜨고 나면 분명 까마득할 테지만, 눈에 보이는 걸 보지 않을 수 있나요?
비의, 관찰 판정!
양사비의: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63
판정결과: 실패
몰리:혹시 이거 강행이나 행깍리롤 되나요? ㅋ
태은 (GM):되...............기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중요한 부...분은?아니라?
궁금해서못참겟다!!!하시면 하셔도돼요,
몰리:아.. 하
궁금하니까 해볼래
태은 (GM):조아조아 멀로하시나요
몰리:행깎리롤로!!
태은 (GM):조아요~~~ 가보자구,
양사비의: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30
판정결과: 보통 성공
오늘 하루를 온통 함께했는데도 꿈에서마저 존재하는군요.
위림의 모습이 보입니다. 벚꽃이 떨어지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어깨 위로 새하얀 꽃잎이 떨어지는군요.
때마침 바람이 불자 비처럼 쏟아져내립니다.
그것이 몹시 어여쁘다는 사실과, 그 속에 있는 사람이 무척 어울렸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때마침 위림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듯 뒤돌아봅니다.
위림:이제 온 거야? 같이 등교하자.
더없이 기쁜 얼굴로 말하는군요.
저 말은 누구에게 전하는 걸까요?
고개를 돌리면 아마 그 사람이 있을 겁니다. 꿈이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면요.
보통 늦잠을 잘 때마다 저 말은 당신의 차지가 되었고, 위림이 언제나 즐거이 말해주었는데……
어째서인지 당신의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비의, 지능 판정!
양사비의: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 그렇군요.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 웃음은 주인공이었던 그녀의 것이었군요.
그렇다면 이 꿈은 어쩌면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미래라는 걸까요?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분명 이상할 거예요.
하지만, 이 순간으로 인해 오히려 당신의 처지를 실감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몫이 아닌 걸 탐내지 않는 것.
그야말로 엑스트라다운 태도가 아니던가요.
참 낯설고도 낯설지 않은 표정입니다.
대상이 다르지 않았다면 가장 익숙한 얼굴이었을 거예요.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은 위림이 저렇게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의 어느 사람보다 가장 가깝고,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사이니까요.
Chapter 2. 내가 모르는 너
... ...
창문 너머로 빛이 스며듭니다.
그러고 보면 하도 피곤해서 교복조차 갈아입지 않았는데, 커튼을 쳐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이른 아침의 봄볕이 그대로 얼굴 위로 쏟아집니다.
아직 한기가 남아있는 계절이긴 하지만, 대놓고 손전등으로 빛을 쏘는듯한 느낌을 버틸 수 있을 리가요.
해가 중천에 떴다는 의미이기도 할 테니 서둘러 일어나야겠습니다.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올리면……
위림:좋은 아침. 잘 잤어?
이상하군요. 잠이 덜 깼나?
양사비의:…….
너, 왜 여깄어?
위림:너랑 놀러가려고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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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어젯밤의 꿈에도 위림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저런 얼굴이 어디 흔하겠나요. 두 눈을 뜨고 감아도 어른거릴만도 합니다.
다시금 두 눈을 감았다가 떠보아도…
위림:하하, 아직 졸려?
양사비의:…….
아무래도 착각이 아닙니다.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와서 앉아있는 건 위림이 분명합니다.
양사비의:(아직 정신이 몽롱하다. 그 아이가 이 옆에 있다는 건 알겠는데, 어딘가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현관, 잠그고 들어왔던 것 같은데……
위림:안 그래도 열어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슬쩍 열어보니까 열려있어서 그냥 들어왔어. 미안. (능청스럽게 웃는다.)
어제 피곤했나보네, 교복 그대로 잔 거 보니까.
양사비의:아, 맞다. 나……. (옷도 안 갈아입고 자버렸지.)
집안일, 해야해. (비척비척 일어난다.) 설거지도 안 해놨고…….
위림:바로 해야 돼? 좀 냅둬도 괜찮지 않나? (일어나기 편하게 몸을 살짝 물린다.)
양사비의:쌓아두면 벌레 꼬인단 말야, ... (반쯤 몸을 일으켰다가, 여즉 몸이 가볍지 않아 그대로 다시 누워버린다. 고개를 돌려 상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제서야.)
있잖아, 나 네 꿈 꿨어.
위림:알았으니까 일단 잠 깨고 해. (침대 옆에 놓인 책상에 고개를 괸 채로 비의를 마주본다.) 내 꿈?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가벼운 소성.) 무슨 내용이었는데?
양사비의:몰라, (네가 다른 사람을 보고 웃던 꿈이었다.) 말 안 할래. (그리고 나는 새삼 내 위치와 주제가 무엇인지 되새겼고.)
그냥 네가 나왔다가 사라졌어. 정확히 무슨 내용이었다, 하고 얘기하기에는 힘들어.
위림:궁금하게 해놓고 싱겁기는. (드라마틱한 얘기를 기대했는데. 가볍게 툴툴거리다가도, 그새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그럼 어제도 나 봤고, 꿈에서도 봤고, 오늘도 보는거네?
하하, 이건 좀 로맨틱할지도. (농조와 함께 소리내어 웃는다.)
양사비의:(그렇게 누운 채로 네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팔로 제 무게를 받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림, ...
저기 있는 내 폰 좀.
위림:(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건네준다.) 자.
양사비의:(스마트폰을 켜서…… 인터넷을 들어간다.)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가 뜨지는 않았을까, 그런 우려를 하면서 이리저리 살펴봤다.)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2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오늘 올라온 기사와 어제 오후에 올라왔던 기사들을 빠르게 훑어봅니다.
일기예보, 꽃 개화 예보를 비롯하여 전국과 세계 각지의 소식들이 올라와 있는데, 어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는 없습니다.
아직 기사화되지 않은 걸까요? 우선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위림: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여즉 웃는 얼굴이다.)
양사비의:(누구 때문에 스마트폰을 확인한 건데. 미간 사이에 작은 골이 패였다.)
(미미하게 불퉁한 소리로 얘기한다.) 나 옷 갈아 입을 거야. 잠깐 나가있어.
위림:(미세한 골의 의미를 아는 건지, 짓궂은 미소를 띤다. 곧 자리에서 일어선다.) 네에~ 1층에서 기다릴게. 빨리 와. (방문을 닫기 전 비의와 한 번 더 시선을 맞추고는, 짧은 눈웃음과 함께 문을 닫는다. 곧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난다.)
양사비의:(문이 닫히면 그 자리에서 잠깐 멍하니 벽을 본다. 이상하다. 현실감이 없다. 사실 누구도 그 아이가 죽었다는 걸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럴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라도 위안하고 싶다─ 자리에서 일어나 교복 셔츠의 단추부터 하나씩 풀어낸다. 평소 입는 가벼운 차림의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
(방문을 열어 네가 있을 1층으로 내려가기 전, 양손으로 마른 세수를 한다.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네 옆에 있는 걸 좋아할 수 있다면 행복했을텐데…….)
(눈을 질끈 감고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이 얼굴을 문지른다. 그 다음에야 문고리를 돌려 바깥으로 나갔다.)
위림:(1층의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본다. 한쪽에 피어있는 노란 꽃에 시선을 두었다가, 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면 곧장 그쪽을 본다. 시선이 마주치면 버릇처럼 눈매가 휘어진다.) 맨날 교복 입은 것만 보다가 사복 입은 거 보니까 느낌이 또 새롭네.
배는 안 고파?
양사비의:…… (말소리를 들으면 고민하듯이 한 손을 자기 배 위에 얹어본다. 배가 고픈가. 떨어져나간 현실감이라는 게 도통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이상하게 식욕이 없네, 어제부터.
위림:그럼 안 되는데. 오늘 가고 싶은 곳 정해서 왔단 말야.
멋대로 혼자 정해버렸군요.
위림:너 뜨개질 좋아하잖아. 그래서 여유롭게 뜨개질 할만한 분위기 좋고 브런치 맛있는 카페 가려고 했는데.
가주면 안 돼? (눈썹을 축 내린다.)
완전히 그렇다고 하기에도 애매하게 되었습니다. 배려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넘치는군요.
양사비의:……
가서, 토스트 정도야…… 그 정도는 먹을 수 있으니까. (우회적인 긍정이다. 축 처진 눈썹을 문질러서 바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은 바로 행동이 된다. 검지 손끝이 네 눈썹 끝을 툭 건드린다.) ... ...
그런 표정 하지마.
위림:(대답에 얼굴이 반쯤 펴졌다가, 눈썹 끝에 닿아오는 손길에 원래대로 돌아온다.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양 시시덕거린다.) 왜, 못생겼어?
양사비의:…… 못, ...
생긴 건, 아니야. 네가 안 못 생겼다는 건 자기가 제일 잘 알면서……
불쌍해보이는 얼굴 하는 게 가여워서 그렇다, 왜.
위림:내가 가여운 건 싫어?
양사비의:뭐라도 해주고 싶잖아. 싫은 건 아니야.
위림:역시 이런 거에 약하구나. 뭐라도 해줘. 나 받는 거 좋아해. (시덥잖은 소리를 했다.)
양사비의:……약았어. (그런 말을 남기고는 거실에 놓인 뜨개질 거리를 챙긴다.)
위림:하하, 그래도 싫지 않잖아. (자리에서 일어서 현관 쪽으로 향한다.)
양사비의:(하나밖에 없는 에코백 안에 이것저것 집어넣는다. 뜨개실, 뜨개바늘, 그리고 여러가지……. 물건을 집어넣고 가방을 어깨에 걸친다.) 너는 특별하니까.
그냥, 널 보면 내가 뭐라도 다 해주고 싶어.
싫지 않은 거랑 별개로, 내 마음이 그래.
위림:(문고리를 열려던 손이 멈춘다. 뒤를 돌아보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오로지 비의만을 바라본다. 정말이지, 나는……) 너한테만, 나만 특별하면 좋겠다.
(그래야…) 맨날 뭐라도 다 받고 싶어. 너한테. (목구멍 너머로 나오지 못하는 말은 삼킨다. 평소와 다름없는 낯으로 문을 연다.) 가자. 빨리 가서 브런치 먹고 싶어.
양사비의:(너는 이미 특별해. '나한테만' 특별할 수 없을만큼 특별하지. 눈꺼풀을 느리게 여닫았다. 네 옆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기며 가방을 고쳐맨다.) 예를 들면, 뭘 받고 싶은데?
목도리 하나 더 떠줄까?
위림:목도리는 받았으니까, 목도리 말고……. (짧게 침음하며 밖으로 나선다.)
나중에 졸업하면 교복 단추나 하나 떼 줘. 어차피 필요 없잖아.
양사비의:(바람이 분다. 사랑을 위해 지어진 세계가 아니랄까봐, 따듯하고 시원하다.) 교복 단추는 좀 그래. 우리 둘 사이에 연애 감정 같은 게 오고간 것 같잖아.
위림:너… 그런 것도 신경 쓰는 타입이었어?
양사비의:어차피 나 아니어도, 네 양손에 다른 여자애들 단추로 가득할 건데.
걔네들 단추 사이로 내 거 하나 더 얹어주는 것도 좀 그래.
위림:(고요히 비의의 얼굴을 마주한다.) 네 거 아니면 다 쓸모 없는데.
다른 거 다 받아도 네 거 빼고 다 버릴 거야.
양사비의:…… (잠깐 입술을 달싹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묻는다.) 왜?
위림:말했잖아, 쓸모 없다고. (하나로 묶어올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낀다.)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어. (당연한 것을 말하듯 평이한 어조다.)
네 것만 갖고 싶어. (언제나, 몇 번이고…. 올곧은 시선에 옅은 그림자가 진다. 찰나의 순간에 봄 햇살에 녹아 사라진다.)
양사비의:……. (꿈 속에서 너는 가장 아름다운 웃음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내보였다. 그러한 미소를 받아 마땅한 사람.) 내가 사실, 내 단추를 주고싶은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옆 반에 있잖아. 키 큰 애. 운동부에.
걔한테 줄까, 하고 생각했는데.
위림:싫어. (말을 가로채 자른다.) 내가 특별하다고 했잖아, 네 입으로. 뭐라도 다 해주고 싶다며.
그럼 나한테만 줘야지.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다. (네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뻔뻔하게 군다. 그래야 불안이 가실 것 같아서.) 나한테 줄 거 다 알아.
양사비의:솔직히 말해도 돼?
위림:……. (말없이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할까? 싫다는 말? 줄 생각 없다는 말?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고개를 젓는다. 결국 또 두려움이 앞서고 만다.) 나 줄 거라고 생각할래.
양사비의:네가 그럴 때마다 내가 자꾸 주제넘는 생각한다고, ...
그냥 들어. 생각은 마음대로 하고.
(손끝이 가방끈을 문지른다.) ……브런치 카페 얼마나 더 걸어야하지?
위림:(주제넘는 생각은 뭔데. 네가 이럴 때마다 나는…….) 곧이야.
봄바람이 한 줄기 둥글게 똬리를 틀듯 불고, 발목을 둥글게 감아옵니다.
그런 간질간질한 바람 탓에 그 사이에 손을 잡아오는 또 다른 손의 존재를 뒤늦게 깨닫습니다.
단단히 힘주어 잡는 것이, 놓기 싫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카페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위림이 신경 써서 고른 모양이니, 분명 나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피해자를 염려해야만 하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우려해야 하는데…
위림과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자각도 안개처럼 피어오릅니다.
비의, 아이디어 판정!
양사비의: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66
판정결과: 보통 성공
문득 위림을 바라보면……
여전히 기쁘다는 듯 웃고 있습니다.
저 낯을 보고 있으면 벼락같은 확신을 느낍니다.
위림은 당신을 해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을.
주인공마저 태연히 난간에서 밀어버린 사람인데도, 우리는 그저 같은 반의 친구에 불과한데도……
비의, ◼◼◼ 1D10 상승합니다!
양사비의:8
8 상승합니다!
거리를 꽤 걸은 것 같더니, 위림이 검지로 한쪽을 가리킵니다.
언제부터 저런 건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사방이 조용한 골목 한쪽에 자리한 카페가 보입니다.
안에 식물이 많아 꽤 고즈넉합니다. 주택가 사이에 이런 곳이 있는 줄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위림:빨리 들어가자. 나 얇게 입어서 추워. (춥지 않지만 괜히 하는 소리다. 맞잡은 손을 당겨 부추긴다.)
양사비의:(맞잡은 손 사이에 꼭 교복 단추가 들어가있는 것 같다. 주제넘은 생각, 절대 전해질 리 없는 고백, 사람을 죽이고 관망했다는 비밀까지. 손이 떨어졌다가는 그 사이에 잡힌 것들이 전부 새어나올까봐, 힘주어 맞잡고는 발걸음을 나란히 한다.)
...들어가서 장갑 떠줘야겠네. 손도 차가워.
위림:(소성을 흘린다.) 벙어리 장갑으로 부탁해.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무 문에 붙어있던 종이 작게 울립니다.
딸랑, 카운터 쪽에서 아르바이트생이 두 사람을 맞이합니다. “어서 오세요.”
주변을 바라보면 편안해 보이는 의자와 테이블이, 카페의 저 끝에서는 책장이 보입니다.
[카페 외부로 가져가지 마세요.] 라고 적혀있는 안내문 위로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습니다.
카페에 있는 것치고는 꽤 많은 양입니다.
위림:브런치 메뉴랑 마실 거 있나 봐봐. 브런치는 햄치즈 토스트가 제일 맛있더라. (좁다란 메뉴판 앞에서 재잘거린다.)
양사비의:커피 제일 싼 거…….
토스트는 네가 얘기한 거 먹을래. (메뉴판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얘기했다.)
위림:알았어, 커피 제일 비싼 거. (똑바로 들었지만 부러 반대로 얘기한다. 좋은 것만 즐기면 좋겠으니까.)
양사비의: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실 '제일 싼 커피'를 다른 말로 변주해서 말한다. 이것을 귀담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그거랑, 음…… (뒤늦게 메뉴판을 훑어보면서 이리저리 살핀다. 검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킨다.) 이것도. 유자 샐러드.
위림:알았다니까. 아몬드 크림 라떼. (메뉴판에 [시그니처 메뉴]라고 적혀있는 제일 비싼 메뉴를 읊는다.) 주문하고 나오면 가지고 갈게. 먼저 가서 앉아있어. (능청스레 웃는다.)
양사비의:…….
위림:그냥 좀 먹어줘, 응?
양사비의:(메뉴판의 숫자들이 춤을 춘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좀처럼 지울 수가 없다.) 남, 남자친구인 줄 알겠어. 누가 보면…….
제일 비싼 커피도 사주고. ...
위림:(경박한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남자친구 자리 너무 싸게 주는 거 아냐?
그럼 이렇게 된 거 오늘 하루는 남자친구 노릇 좀 해볼까?
양사비의:…… (메뉴판으로 얼굴 가릴 생각을 했는데, 메뉴판이 너무 얇고 길쭉하기만 하다.)
(멋쩍음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 아니면서. 남자친구 예행 연습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위림:진짜 남자친구 해주는 수가 있다. (부러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마주본다. 제법 진지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피식, 웃음이 샌다.) 가서 앉아있어. 여기 인기 많아서 빨리 자리 잡아야 돼.
양사비의:(잘생긴 얼굴 좀 들이밀지 마. 진짜 심장에 안 좋단 말이야. 고작 엑스트라가 주제 넘게 만드는 얼굴이라는 걸 알고 있느냐며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 ...
(말도 못꺼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 먼저 자리 잡을게. (삐걱거리면서 창가의 빈 자리로 향했다.)
등 뒤로 위림의 주문 소리가 들립니다. 아몬드 크림 라떼 두 잔이랑, 유자 샐러드랑……
영 제멋대로군요.
자리를 잡으려고 카페 안쪽으로 향하면, 넓지 않아 오히려 소박하고 아늑한 공간이 보입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세가 있는 카페인지, 두 명이 앉을만한 자리는 책장 근처 딱 한 테이블만 남았습니다.
양사비의:(앉으려던 창가 자리는 누군가가 벌써 앉아버렸다. 어쩔 수 없이 책장 근처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 ...
그래도 창가에서 멀지 않아 바깥도 잘 보이고, 햇볕도 잘 드네요! 다행입니다.
자리에 앉아 짐을 내려놓고 위림을 기다리다보니, 문득 시선이 책장에 닿습니다.
무슨 책이 있는지 구경이라도 한 번 해볼까요?
양사비의:(턱을 괴고 책장을 바라본다.)
비의, 자료조사 판정!
양사비의: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3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책장을 눈으로 살피다 보면 눈에 띄는 제목이 몇 개 있습니다.
[뫼비우스와 영원의 상관 관계], [사랑에 관하여], [장◼◼ ◼◼의 임◼◼]이라. 어떤 것부터 읽는 게 좋을까요?
양사비의:(눈을 두어번 깜박거린다. 이름이 지워진 책부터 꺼내든다. 책이 많이 낡은건가?)
[장◼◼ ◼◼의 임◼◼] 핸드아웃 오픈!
유독 이 책만 이상합니다. 페이지를 읽으려고 해도 글자가 깨져있습니다.
책을 덮었다가 펼치고, 눈살을 괜히 찡그려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데이터 파일이 깨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세상이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기는 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조금 허탈하군요.
양사비의:…… (맞아. 그렇겠네. 이 세상이 온전하다면 그게 이상하다.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이 구현되어 있다면 게임일 수가 없다.)
(그냥 그럴싸한 동화를 흉내내고 싶은 데이터였겠지. 책을 넣어두고 '사랑에 관하여' 라는 책을 꺼낸다.)
[사랑에 관하여] 핸드아웃 오픈!
양사비의:…….
(나는…….)
사랑하긴 해. (그래서…… 나 아닌 다른 누군가랑 행복해하는 게 보고싶은 거고.)
(그 아이와 내가 행복해질 수는 없는 걸까? 그러고 싶은 욕망과 별개로 그래서는 안된다는 의무가 마음을 막아서는 게 틀림없다.)
(당신의 삶을 살아가는 오늘, 행복한가. 그 문장을 몇 번 문지르다가 책을 덮고 원래 있던 자리에 밀어넣었다.)
(마지막 남은 책을 꺼낸다. 제목만 봐도 재미는 없어보이는 '뫼비우스와 영원의 상관 관계'라는 책이다.)
[뫼비우스와 영원의 상관 관계] 핸드아웃 오픈!
양사비의:(흠. 뭐, 단순한 주장에 불과한 책이었구나. 눈으로 빠르게 훑고는 이 책 또한 닫는다. 책장에 가지런하게 꽂아둔 뒤에 주위를 살폈다. 사실 상, 인파 사이에 섞여있을 사람을 찾는다는 말이 더 맞았다.)
그때, 위림이 유리잔 두 개와 샐러드 보울, 토스트 두 개가 올라가있는 나무 쟁반을 들고 다가옵니다.
위림:뭘 그렇게 열심히 읽고 있었어? 커피 기다리면서 보니까 독서에 열중이던데.
양사비의:여기 책이 이거저거 많잖아. 너도 읽을래? (방금까지 읽고 있던 뫼비우스... 어쩌고를 꺼낸다.)
위림:나 책 싫어하는거 알잖아. 제목만 봐도 고리타분하네. (고개를 설설 젓는다.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둔다.) 자,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능청스럽게 아몬드 크림 라떼를 비의의 앞에 둔다.) 유자 샐러드랑 햄치즈 토스트. (나머지 그릇들도 앞으로 민다.)
양사비의:아이스 아메리카노 위에 크림도 올라가네, 여기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테이블 위에 올라오는 음식을 본다. 샐러드의 싱싱함이라든가, 토스트의 바삭함을 마주하자니 없던 식욕이 점점 생기는 것 같다.)
뜨개질은…… 식사 끝나고 해야겠다. 앉아. 토스트 절반으로 잘라줄게.
위림:그럼, 유명한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시시덕거리며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브런치 함께 먹겠다고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굶주린 배가 아우성을 치는 것 같다. 아무렴, 그래도 마냥 즐겁기만 하다.) 예쁘게 잘 잘라줘. (포크와 나이프를 비의 앞으로 놔준다.)
양사비의:(정갈하게 토스트를 절반으로 자른다. 절단면에서 치즈가 쏟아지면, 포크랑 나이프로 쏟아진 것들을 모아 위림이가 먹을 토스트 위에 얹어준다.)
여기 지난 번에도 와본 적 있어? 나는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위림:(녹아내려 흐른 치즈를 제 몫의 토스트에 얹어주는 일련의 행위를 물끄럼 바라본다. 명백한 호의의 행동. 오롯이 나만을 위한…….) ……. (내가 특별하다는 네 말은 거짓이 아니다. 네가 거짓을 고할 성격이 아닌 걸 알아도, 이런 식으로 확인받고 나면 어쩔 도리 없이 기뻐진다.)
(자연히 입꼬리가 올라간다.) 몇 번 왔었지. 여기 커피 맛있거든.
양사비의:……… (상대방을 흘긋 본다.) 누구랑?
위림:혼자서. (나이프로 토스트를 가볍게 찌른다.) 누구랑 같이 온 거 네가 처음이야.
양사비의:……참나.
(모르겠다. 네가 몇 번 와보고 나서, 이곳이 괜찮은 곳이라는 걸 확정한 뒤에 날 데려왔다는 게. 그걸 생각하면 어떠한 말도 쉽게 내어놓지 못하겠다.) ……참나.
그래서, 봄방학도 됐겠다 나랑 같이 온 거야?
위림:응. 그전부터 너랑 오고 싶었어.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그러고는 토스트를 한 입 베어문다.)
양사비의:(네가 먼저 먹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저 역시 토스트를 한입 크기로 잘라 먹는다. 입안에 밀어넣으면 고소한 치즈와 짭쪼름한 햄이 맛있게 어우러졌다.)
(우물거리며 답한다.) 진짜, ……남자친구 같네.
위림:(상대가 토스트를 먹는 동안 말을 잇는다.) 여기, 식물도 많고. 해도 잘 들고. 아늑하고, 그래서…… (입을 다문다. 가만히 비의를 바라본다. 그래, 나는 너랑……)
(몇 번이나 그렸던 풍경을 생각한다.) 이 정도면 일일 남자친구 할만하지 않나? (그 모든 걸 덮어두고 실없이 웃는다.)
(깨뜨리고 싶지 않다.) 어때?
양사비의:…….
(깨닫는다. 나도 주인공이 되고 싶어. 적어도 너의 주인공.)
(다른 조각을 자르려던 손이 멈췄다. 한 번 바라본 욕심을 어떻게 갈무리할지 모르겠다. 유례없이 어색한 기색을 내보이며, 떠듬떠듬 말을 잇는다.)
하루, 하루 정도는…….
특별히 허락해줄게.
위림:(순식간에 낯에 화색이 돈다. 슬쩍 올라간 입꼬리에 기쁨이 만연하다. 오늘 하루뿐이라지만 아무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잘 부탁해, 일일 여자친구.
양사비의:(한입 크기를 멋쩍게 더 잘라낸다.) ……
근데, 남자친구랑 여자친구 사이가 되면…… 보통 뭐하고 지내?
위림:글쎄? 뭐… 그냥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대부분이지 않나. (마저 토스트를 한 입 더 먹는다.)
그렇게 치면 우린 그전부터 그런 사이였던 거네. (농조.)
양사비의:(잘라낸 조각을 먹으려다가 멈칫한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게 얘기하는 듯한 시선으로 너를 바라본다.)
……림. (잠깐 머뭇거린다.) 아, 해 봐. (제가 먹으려던 조각을 네 입 가까이에 가져다댄다.)
위림:그렇게 볼 것까지야.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다. 커피를 한 모금 삼키다가, 제 앞으로 내밀어진 것과 상대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 (이렇게까지 좋을 일인가……. 입꼬리가 자꾸 올라간다. 하지만 숨기지 않고 곧대로 웃고 만다. 막을 방법도 모르겠고, 숨기고 싶지도 않다. 냉큼 입을 벌린다.) 아.
양사비의:(웃는 얼굴이 좋아. 아, 이상하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뛴다. 한여름 날씨에 힘껏 내달린 것처럼 덥고 열이 오른다.)
(토스트 조각을 네 입에 넣어준다. 웃음을 머금은 양 입술이 닫히는 걸 보면 그대로 포크를 빼냈다.)
…… (우물거리는 네 모습을 바라보다, 괜히 식기를 내려놓고 커피 한 모금을 넘겨 마셨다.) 낯간지럽네, 이런 거. 은근히…….
위림:(여전히 실실 웃는 얼굴이다. 더 보고 싶다. 부끄러워 하는 것도, 욕심낼 것처럼 구는 것도…. 씹어 삼키는 것이 토스트인지, 아니면 고백인지 알 수 없어진다. 뒤늦게 입을 연다.) 난 좋은데, 네가 낯간지러워하는 거.
양사비의:왜, 왜. (커피잔에서 입을 떼서 내려둔다.) 놀리려고 그러는 거지. 그치.
위림:진짜 커플 같잖아. 남자친구 처음 사귀는 애 같고.
양사비의:(수줍어서 할말이 전부 타들어간다. 생각이 용광로에 빠져서 부끄러움으로 부글부글 끓는다.) ……
몰라, 마저 먹기나 해. (한조각을 힘을 주어 자르고 다시 포크를 입가에 내밀기나 한다.)
위림:하하! (경박하게 웃는다. 이런 모습을 매일 볼 수 있었을 텐데. 매일, 함께, 같이 지내면서……. 햇빛이 길게 드리워 그림자가 옅다.)
그래도 나랑 있는 게 좋지?
양사비의:야. (드물게 이름이 아닌 말로 너를 부른다.)
위림:왜, 비의야. (자신은 이름으로 부른다.)
양사비의:너 자꾸 그러면 내가 채가. '일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엄포 놓듯이 딱 끊어서 얘기한다.)
위림:채가라고 시위하고 있던거 이제 알아차리네.
너무 늦잖아,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시덕거린다.)
양사비의:(얼굴이 슬그머니 붉어진다.) 이런 것도 다 놀리는 거잖아. 하나하나 전부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위림:내가 여태 하던 건 협박이었나… 눈물 나네, 이거. (눈썹을 축 내리다가도, 금세 비의의 빈 손을 가볍게 깍지 껴 잡는다.) 그래도 돼.
난 여태 너한테 거짓으로 대한 적 없어. (붙잡은 손에 힘을 준다.)
양사비의:…….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무력한 생각과는 별개로 맞닿는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쥔다. 내 생각에 이건 좋기만 한 날씨 때문이다. 춥던 겨울이 녹아서. 그게 아니라면 카페의 음악이 잔잔해서 둘 다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너… 너,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그 때에는 내가 채가줄게. (손가락 끝을 움찔거린다.)
위림:(손등을 슬며시 눌러오는 압박이 좋다. 미약해도 분명한 손길이 나를 잡아주고 있어서, 몇 번이라도 네가 잡아주기만 하면 전부 괜찮을 것 같아진다. 이상해, 정말로. 그래서 나는 네가, 언제나……) 기다리다 목 빠지면? 그것도 네가 책임지는 거야?
양사비의:내가 빠진 목 붙들고 다시 끼워맞춰줄게.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보랏빛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네 턱 부근만 회피하듯 바라보고 있더랬다.) 나머지도 다 책임지고.
위림:하하, 그럼 목 빠져도 걱정 안 할게. 예쁘게 잘 껴줘야 해. (공소리로 대답하며 네 손등을 가볍게 문지른다. 꼭 저를 제대로 봐달라는 양.) 네 남자친구 될 사람 머리니까 소중하게 다뤄주구.
양사비의:하나만 물어봐도 돼?
(내려갔던 시선을 위로 올린다. 떠듬거리며 질문한다.) 나같은 게 왜 좋아?
위림:나같은 거, 라니. 그렇게 얘기하지 마. (드물게 목소리가 엄해진다. 햇빛 아래에서 맞잡은 손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곧 평소의 가벼운 어조다.) 너만 날 제대로 봐주니까. 처음엔 그래서 좋았는데, 시간 지나고 보니까 그냥 다 좋아졌어.
멍하게 생긴 눈매도, 높낮이 없이 시시한 목소리도…… 그냥 다,
너라서 좋아.
양사비의:(시시한 목소리. 네 엄한 말을 들어도 그 시시한 목소리는 여전히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다.) 너도 알잖아. 나 학교에서 그렇게 인기 없는 거. 같이 밥 먹으러 다니는 애도 없고, 단짝이랄 것도 없고.
이상해. 네가 나한테 그렇게 시선을 주는 게. 착각할 것 같단 말야.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고. ...
위림:특별해, 너.
착각 아니야.
나한텐 네가 제일 특별해. 너 말고 다른 사람은 관심 없어. (한 번 내뱉기 시작하니 그칠 줄 모르게 된다. 하지만 그마저도 삼켜내는 것들이 있으니, 차라리 갈라서 안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네가 제일 좋아.
너만 좋아해, 난.
양사비의:……나, 나.
나, 나. (연속으로 말을 더듬는다. 고백을 받았다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왜 자꾸 나를 그렇게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엑스트라인데?
그래도?
위림:또 그런 소리 한다. 이 세상이 엑스트라랑 주인공으로 나뉘어져 있어?
그럼 내 주인공은 너로 할래.
양사비의:……. (자꾸 혼란과 선택으로 밀어넣어지는 게 곤란하다. 마음은 너를 원하는데 머리는 네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이미 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짓을 저질러버렸음에도. 그 아이가 떨어진 바닥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묻어있을텐데.)
내가 생각할 시간을 조금 달라고 하면… 줄 거야?
위림:졸업식 때까지도 기다려줄 수 있어. (옥상에서 매정하게 사람을 밀친 손은 비의에게 닿을 때만 다정해진다. 햇살 탓인지, 더없이 따뜻한 손길로 부드럽게 비의의 손을 한 번 감싸쥐고 놓는다. 사람을 밀친 손같지 않게.) 너니까 기다려주는 거야. 알지?
양사비의:하나만 얘기해둘게. (토스트는 식었다. 먹음직스럽게 늘어나던 치즈는 점점 굳어간다. 커피의 크림도 녹아가는 와중에 네 손만 변치않고 영원히 부드러울 것 같다.)
나, 나도 너 좋아해. 아마도 그런 것 같아. 괜히 이런 부분에서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서 미리 말해두는 거야. ……
그래도 사귀는 게 망설여지는 건, 연애라는 게 어떤 건지 전혀 모르겠어서 그래.
다르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사귀게 됐을 때 너랑 손도 잡고, 껴안기도 할 텐데 내가 그럴 준비가 되어있는지가 모르겠어서……
조금만 기다려줘. 마음 정리해서 얘기할게.
위림:(네 손을 놓았던 손끝이 움찔, 떨린다. 내내 올라가있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온다. 꼭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얼굴이 된다.) ……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인다. 이런 얼굴은 보여주기 싫다. 네 앞에선 맨날 웃고 싶으니까, 너랑 있을 때만큼은 기쁜 얼굴이고 싶은데……. 원했던 만큼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다.)
(너무나 원했던 나머지 외려 자신의 착각 같다.) 알았어. (하지만 착각이라도 좋다.)
(네가 날 좋아해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됐다.) 기다릴게, 나.
(벅찰 만큼 속을 가득 채웠던 걸 숨 한 번으로 갈무리한다. 그리고는 곧장 평소처럼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네가 나 좋아한댔으니까, 기다릴 수 있어.
그렇다고 진짜 졸업식 때까지 기다리게 할 건 아니지?
양사비의:이해 좀 해줘. (네 낯을 스쳐지나간 복합적인 감정들을 자세히 알 수는 없어도, 그것들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 하나만큼은 쉬이 알아차린다. 그러니 뒤이어 지어지는 웃음에도 안도하지 못한다. 가까스레 덮어낸 표정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려서.) 내가 아는 남자 사람도 너, 결국 좋아하게 된 남자 사람도 너 하나 뿐이라서……
주변에 상담할 사람도 없단 말이야. ... (무릎을 안쪽으로 밀어넣어 세워진 발코로 바닥을 의미없이 두드렸다.)
봄방학 끝나기 전에는 이야기 할게. 약속.
위림:너한테 하나뿐인 네가 좋아하는 남자라니, 유일무이 좋은데. (드리웠던 그림자는 언제 그랬냐는 양 이미 햇살에 개이고 없다.) 너한테 아는 남자라고는 나만 있었으면 좋겠다… 같은 건 너무한 바람인가? (짧게 소성을 흘린다.)
약속이면 손가락도 걸어야지.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약속해줘. 도장까지 찍어줘.
양사비의:(새끼손가락을 꼭꼭 걸고, 엄지까지 꾸욱 찍는다.) 약속했고, 지장 찍었고. 복사도 해줘?
위림:에이, 복사까지 하면 너무 그렇다. 애도 아니구.
양사비의:군말 말고 손바닥 줘. 복사하게. (그렇게 얘기하고는 손바닥끼리 서로 맞대서 스치도록 두었다.)
(이윽고 여상한 목소리가 흐른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혼잣말인지. 제대로 결정지어지지 않은 흐린 소리다.) 그래도 말야, 지금 이렇게 시간 보내는 게 애인으로서 해야할 전부라면 애인 관계가 돼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까 너무 부정적인 생각하지 말고. 알았지.
위림:(손바닥끼리 스치면 간지럼이라도 타는 것처럼 시시덕거린다. 닿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샌다.) 부정적인 생각 안 해. 난 지금도 너랑 앞으로 갈 데이트 코스 짜느라 바쁘거든. (진심이 담기긴 한 건지, 애매한 어조지만 비의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꼿꼿하다.)
양사비의:(복사까지 마친 손으로 네 코끝을 톡 건드린다. 적어도 이 봄방학 중에 어떻게든 결론을 내릴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다소 편해졌다. 적어도 네게 어째서 그 아이를 밀어버렸는지 언젠가는 물어봐야만 하니까.)
얘기 다 끝났으면 너도 할일 해. 난 이제부터 뜨개질 할 거야.
위림:(코끝을 건드린 손을 깨물 것처럼 앙, 무는 시늉을 한다. 그러고는 금방 턱을 괸다. 봄방학, 봄방학이라….)
(잠시 생각하다가 그만둔다. 그새 사선으로 내려갔던 시선은 다시 비의에게로 향한다.) 난 진작에 할일 준비 다 했어.
양사비의:(뒤늦게 눈을 두어번 깜박거린다.) ... ...?
(뭔데?─하고 물어보는 시선이 된다.)
위림:너 뜨개질하는 거 구경하는 게 오늘의 내 할 일이야. (장난스러운 낯으로 웃는다. 비의를 따라 눈을 두어번 깜빡인다.)
양사비의:…… (진짜 남자친구네.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심심해도 난 몰라.
(말을 마치고 가방에서 코바늘과 하얀 털실을 꺼낸다. 코바늘에 실을 걸어서 매듭을 짓고, 조용히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뜨기 시작한다.)
위림:별 걸 다 걱정하네. (곧 뜨개질에 열중하는 얼굴을, 실을 얽는 흰 손을 바라본다. 잔뜩 몰입한 얼굴이 마냥 귀엽다가도, 정작 무언가에 이리 몰두한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동안 몰랐던 얼굴이 흥미로워 시선이 곧장 비의의 얼굴로만 향한다.)
(곧, 목소리가 따뜻하고 고요한 공기 새를 가른다.) 근데, 뭐 뜨는 거야?
양사비의:(관성적으로 손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너 줄 거.
위림:흠, 그럼 완성될 때까지 기대하게 더 안 물어볼게. 뭐 뜨는지 추측하는 재미를 놓칠 순 없지… (비의의 손에서 얽히는 실을 유심히 본다. 비의가 뜨개질에 몰두한 만큼 집중하는 얼굴이 된다.)
양사비의:(그렇게 기대할만한 건 아닌데…… 고작 코스터 하나를 뜨는데 저렇게까지 집중할 필요가 있나, 멋쩍어진다.) 이건 별거 아니야. 그런데 나중에 너만 괜찮으면 가디건 하나 떠줄게.
위림:나야 네가 떠주는 거면 뭐든 다 괜찮지. 가디건도 좋아. 흰색이나 회색으로 해줘. 아니면 겨울에 목도리랑 같이 입게 목도리랑 어울리는 색이어도 좋겠다.
나 벌써 기대돼. (소리내어 웃는다.)
양사비의:나랑 같이 뜨개질 배워서, 나한테 가디건 떠줄 생각은 있어? (사실 그럴 거라고 기대도 없이 물어보는 질문이다. 한편으로 어떤 색의 옷이 네게 가장 잘 어울릴까 생각하게 된다. 역시 검은색이려나. 채도 높은 색을 입으면 옷에 시선을 빼앗기게 되니까, 정말 중요한 네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위림:나 손재주 없는데. (잠시 고민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떠주면 네가 좋아하지 않을까? 서로 떠준 가디건 입고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그치만 뜨개질 힘들 것 같은데…….)
(점점 고민이 길어진다. 짧게 침음까지 내뱉으며 고민하다가, 오래지 않아 답을 내놓는다. 네가 좋아하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악한 손재주에 관한 걱정을 이겼다.) 떠줄게. 네가 알려주는 거면.
양사비의:……너, 진짜 나 좋아하는구나. (그런 대답이 나올줄 몰라서, 결국 뱉어낸 것은 놀람을 품은 감상이다.)
(이윽고는 조용히 웃었다.) 좋아. 소매만 떠줘도 좋고, 조끼만 떠줘도 좋고. 네가 떠준 거면 어떤 모양이든 다 입고 다닐게.
위림:떠주면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이 미소를 보고 싶어서 ─제 딴에는─이런 말도 안 되는 것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게 되고 만다. 더 웃었으면 좋겠다. 기뻐하는 얼굴이 궁금하다. 그런 욕심이 등을 떠밀어 뭐든 하게 만든다.) 그런 게 어딨어. 나도 가디건 떠줄 거야.
나중에 같이 입고 놀러가자.
양사비의:(꽃모양 코스터가 계속해서 만들어진다. 입가에는 여전히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채다.) 다들 놀라겠네, 그 '림'이 학교에서 가디건을 뜨고 있으면.
어쩌다 뜨개질을 시작한 거냐는 질문도 잔뜩 들어올 것 같아.
위림:(꽃 모양인데, 뭐지? 장식은 아닐 테고… 이리저리 추측해보느라 잔뜩 몰입했다. 그 상태로 흘리듯 얘기한다.) 물어보는 애 있으면 예비 여자친구 줄 선물이라고 할 거야.
양사비의:…… (코바늘이 삐죽, 엇나간다. 그 부분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몰라서 가만히 쳐다봤다.)
(머리에 열이 올라 적당한 해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뜨개거리를 내려놓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린다.) ……그냥 우리 지금부터 확 사귀어버릴까?
위림:(아, 엇나갔다. 그와 동시에 뜨개거리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알았다, 이거 티 코스터다. (확신에 찬 미소를 짓다가도, 네 혼잣말을 듣고 서서히 표정을 바꾼다. 현실감이 없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의아한 얼굴이 된다.) ……지금부터?
진짜? (한 박자 늦게 눈빛에 화색이 돈다.)
양사비의:예비 여자친구가 뭐야, 그냥 여자친구도 아니고. (결국 엉킨 매듭을 풀고 다시 코바늘을 건다.)
위림:언젠간 꼭 내 여자친구로 만들고야 말겠다, 그런 거였지. 동네방네 여자친구 줄 거라고 했는데 네가 나 차면 어떡해.
양사비의:내가 너를 차게 된다면 딱 하나 뿐이야. 내 문제지. (달리 말하자면 '특별하지 못한 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근데…… 잘 모르겠어. 네가 계속 그런 식으로 굴면 정말 자만하게 될 것 같아. 너는 나를 좋아하는구나, 그런 생각으로.
그럴거면 '확 지금부터 사귀어버릴까?' 하고 생각하는거지. 너도 안 불안해 해도 되고, 나도 조금 더 당당해질지도 모르고.
위림:나 너 좋아한대도. 너 좋아한다는 말 듣고 싶어서 자꾸 이런 얘기 하는 거지? (네 뺨을 손끝으로 가볍게 쿡 찌른다.)
네가 주눅들지 않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재어보지 않으면 좋겠어. 나는 네가 너라서 좋은 거니까.
차라리 머리 열어서 보여주고 싶다,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
양사비의:(뺨이 쿡 찔린다. 네 손가락이 있는 쪽으로 오히려 고개를 기울이며 뺨이 더 눌리도록 만든다.) 얼마나 좋아하는데?
위림:(뺨을 찌르던 손을 바꾸어 네 뺨을 감싸쥐듯 받친다. 이마저도 마냥 사랑스럽다.) 하늘만큼 땅만큼, 은 너무 진부한 표현이니까……
너만 있으면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 도, 너무 식상하지 않나….
양사비의:(정작 그런 표현을 다 듣는 자신은 너무 부끄러워서, 뜨개질을 더 이어나가지 못하고 양 주먹만 꼭 쥐고 있더랬다.) ...
위림:이게 좋겠다. 만약 내가 무대 위 주인공이고, 너는 커튼 뒤의 스탭이라거나, 지나가는 행인 1 같은 역할이라면…, 나한테 오는 스포트라이트를 다 너한테 비춰서 널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어.
내가 빛을 받지 못해도 네가 받고 있다면 난 그걸로도 기쁠 거거든.
양사비의: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네. ...
그럼 같은 방식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려나. (손을 잠깐 꾹 쥐었다 핀다.)
내가 이런 식의 좋아함을 누군가한테 받아보는 게 처음이라서, 어색한가봐. (와중에도 차분하게 자기의 상태를 설명하려고 들었다. 나름대로 냉정을 유지하려는 ─부질없는─ 노력에 가까웠다.)
그래도, 한가지는 꼭 물어보고 싶어. 내가 너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좋아하려면 꼭 필요한 질문이야.
만약에 나를 좋아해서, 혹여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대도…… 괜찮아?
위림:(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응.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어정쩡하게 행복해지느니, 너 좋아하면서 불행한 쪽이 더 행복할 것 같아.
그리고 사실, 말이 안 되지. 널 좋아하는데 어떻게 결말이 불행해? 그게 나한텐 최고의 해피 엔딩인데. (손바닥에 기대있는 뺨을 가볍게 문지른다.)
양사비의:나, ...
나는 너랑 연애하게 된다면 그런 거 다 각오할 거야. 설령 네가 경찰에 붙들리는 날이 온대도. (이 말이 어떤 날에 일어난 사건을 내포하고 있는지, 너라면 분명 바로 알아차릴 터였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각오하고 있는지도.)
그러니까 무척 중요한 질문이었는데…… 됐어, 답 들었으니까. 바보 남자친구.
위림:바보. (부러 나무라는 듯한 어조로 내뱉어봐도, 얼굴에 만연한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네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마음 먹을 때마다 기쁘고, 또…) 내가 그렇게 좋아?
양사비의:……
응. 좋아.
왜냐하면 그만큼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잖아. 너는. (손을 꼼지락댄다. 코바늘만 주무르듯이 매만졌다.)
위림:나도 너 좋아.
네가 나 좋아하는 만큼. (조금은 수줍어하는 낯 새로 즐거운 소성이 흐른다.)
양사비의:진짜?
너 그럼, 내가 여기에서 당장 경찰한테 끌려가도 나 좋아해 줄 거야?
위림:당연하지. 말이라고 해?
그것보다 더한 거 해도 좋아할 거야.
양사비의:내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일단 말은 내뱉었는데, 그럴싸한 가정이 떠오르지 않는다. 언젠가 읽었던 책이 문득 생각난다.) 벌레가 되면?
상자에 넣고 키워줄 거야?
위림:하하! 바퀴벌레면 좀 징그러울지도 모르겠는데… (잠시 고민하듯 침음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웃음소리 새로 사라진다.) 그래도 잘 키워줄게.
바깥 구경하라고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넣고… 햇빛도 쬐라고 해 잘 드는 창 앞에 놔줄 거야.
양사비의:…너 진짜 나 좋아하네.
이렇게 좋아하는데, (잠깐, 쟤가 주인공 아닌 '나'를 좋아해도 되는 건가?) 이전에는 왜 별다른 말도 없었어?
딱히, 티 안냈잖아. 난 당연히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할 줄 알았고. …
위림:약점 보여주는 것 같잖아. 밑지는 것 같고……
근데 이젠 좀 밑져도 되겠다 싶더라고. 갑자기. 나 변덕 심하잖아.
양사비의:갑자기?
위림:원래 사랑은 다 그런 거야.
양사비의:(코바늘을 내려놓고 턱을 괸다. 표정이 조금 뚜해졌다.) 너 사랑 잘 알아?
위림:그럼. 나만한 고수도 없을걸?
양사비의:(하순을 비죽이듯이 짧게 내민다.) 이전에 여자친구도 없었잖아.
나도 모르게 누구랑 사귀고 그랬어?
위림:에이, 그랬겠어? 주변 애들 하는 거 보고 배운 거지. (비죽 나온 입술을 검지로 가볍게 톡 친다.)
왜, 여자친구 있었으면 질투날 것 같아?
양사비의:아마도. 조금 기분이 복잡했을 것 같아.
물론 네 결정에 뭐라고 할 수 있었겠어. 그냥…… 아, 말 안 할래. (혼자서 삽질만 신나게 했을 게 자명하니, 오래 붙들어보았자 마음 한 켠만 찝찝할 뿐이다.)
나, 나는…… 나한테는…… 좋아하는 사람이, 네가 처음이니까……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으면 포기했겠지. '친구로도 충분하다', 하고 생각하면서.
위림:질투도 할 줄 아는구나. 난 질투 많은 사람도 좋아. (네가 하는 거라면 뭐든 다 좋아서 문제지. 뒷말은 너무 고백 같아 숨과 함께 삼켜버린다.)
그나저나… 다행이네, 나도 네가 나 이전에 애인 있었으면 질투나서 못 견뎠을 거야. 그럼 그땐 네 남자친구를 밀쳤으려나… (질 나쁜 농담을 하면서도 표정은 마냥 즐거워 보이기만 한다.)
우리 둘 다 서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면 좋겠다. (입술에 닿았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코바늘을 쥔 손등을 가볍게 감싼다.) 꼭.
양사비의:…… (남자친구를 밀친다, 그 부분에서 척추를 타고 한기가 흘렀다. 이 세계가 정말 게임이라면, 이렇게 큰 오류가 발생했는데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듯 흘러가도 괜찮은 건가?)
(고개를 내린다. 제 손을 감싸잡은 네 손이 보인다.) ……이상한 소리 하나만 할래. (말을 마치고 허락을 구하듯 시선을 올렸다. 보랏빛 눈을 빤히 본다.)
위림:(뭐든 좋다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다.)
양사비의:만약에 너랑 내가 있는 지금 여기가 하나의 게임이라고 가정해봐…….
그런데 그 게임에서 무언가 아주, 엄청 큰 오류가 하나 발생했어. (이 이상으로 어떻게 네게 직접적으로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인공이 되는 기분에 심취하기에는 나는 겁도 많고 걱정도 많은가봐.)
그 오류가 고쳐지면…… 아마도 네 곁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있을텐데, 그때에는 어떻게 할 거야?
오류 같은 거 안 고치고…… 그냥 가만히 있을 거야?
위림:응. (일말의 고민도 없는 대답이다. 애초에 이런 답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너랑 있을 수 있는데, 뭐하러 고쳐? 이 세상이 잘못됐든 어쨌든 난 너랑 있으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좋은데.
너 없는 세상이면 차라리 망하는 게 낫지 않나? 하나도 즐겁지 않고 기쁘지도 않을 텐데… (웃음기 섞인 어조지만, 의미는 확실했다. 시선이 올곧게 비의를 향한다.)
(오로지 비의만을.) 가만히 있을래. 시치미 뚝 떼고.
양사비의:(입을 꾹 다문다. 이토록 거대하고 올곧은 사랑을 나는 여태 받아본 적이 없다.)
(엑스트라라는 것은 으레 존재함으로써 모든 가치를 다하지 않나. 그 이상의 기대를 받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그러니 너는 계속 나한테 내 주제를 넘도록 만들고 있는 셈이다.)
……무슨 소리를 해야할지 모르겠어. (너무 커다란 선물을 받은 기분이라서.)
그래도 애써 말을 해보자면,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네 처음도 끝도 전부 나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
오류 투성이인 세상이라고 해도. (엷게 웃는다.)
위림:(일순 표정이 차게 굳는다. 잊고 있었던, 차마 명명할 수 없는 것들이 수면 위로 하나 둘 떠오른다. 순식간에 지난해질 것만 같아 호흡 한 번에 다시 가라앉히고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다. 아무 걱정도, 슬픔도, 애수도 없는 낯. 미소 뿐인 얼굴.)
(손등을 문지르는 손길에 옅은 비애가 묻어난다.) 같은 마음이라는 거잖아. 그럼 됐어.
이제 그만 뜨고 집에 가자. 티 코스터는 내일 받을래. 그래야 만날 구실이 하나 더 생기잖아. 벌써 많이 어두워졌어, 바깥. (어느덧 하늘은 해가 뉘엿 저물어 붉음과 푸른 어둠이 섞여있다.) 집 앞까지 바래다줄게.
문득 창밖을 바라보면, 어느덧 오후가 다 지나가버리고 벌써 저녁입니다.
아직 날이 차서 그런지 해가 빨리 떨어지네요.
양사비의:(시선이 바깥으로 향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시간이 그렇게 흘러버렸나. 주변을 둘러보면 한적한 카페 내부만 시야에 들어올 뿐이다.)
(뒤늦게 주섬주섬 실타래와 뜨다만 것들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다 뜨고 내일 줄게, 그러면.
위림:(비의가 짐을 챙기는 동안 그릇과 잔을 제 트레이로 전부 올린다. 트레이를 들고 카운터 쪽으로 함께 향한다.) 내일도 보자고 약속한 거다, 이거?
양사비의:……우리 내일이 2일인건데, 당연히 만나야지. (가방끈을 어깨에 걸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이 1일이고. (아냐?─그렇게 물어보듯이 빤히 시선을 마주한다.)
위림:(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짧고 경박하게 웃는다.) 맞지. 1일. 내일이 2일.
(내일이, 2일…. 속으로 조용히 되뇌인다. 카운터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선다.) 매일매일 데이트하면 좋겠다.
양사비의:학교 안 가고? (너와 보폭을 맞추며 걷는다. 푸르스름한 저녁빛이 마음을 간지럽힌다.)
매일 데이트하면 질릴지도 몰라. 데이트는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면 충분하지 않으려나.
아르바이트생의 인사를 뒤로 하고서 카페를 나오면, 저 멀리 저물어가는 해가 보입니다.
위림:질리려나? 난 안 질릴 것 같은데…. 잠깐, 등하굣길 같이 가면 그것도 데이트 아닐까? 어쨌든 둘이 같이 걷는다는 건 똑같으니까. (실없는 소리나 한다. 저무는 해를 등지고 걷는다.)
그럼 등하교도 일주일에 한두 번만 같이 해? (번개라도 맞은 양 눈을 크게 뜬다. 일부러 익살스럽게 지어낸 표정이다.)
양사비의:참나, 그럼 수업시간에 같이 짝꿍으로 있는 것도 데이트게.
네 말대로 생각하면 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종일 데이트하는 게 된다?
위림:낭만있고 좋네, 뭐. 자는 시간 빼고 하루종일 데이트하는 커플이라니… 사이 너무 좋다고 다른 커플들도 부러워하겠다. (짐짓 진지한 어투로 말하던 것도 잠시, 곧 경박하게 웃는다.)
새삼, 정말 오래 같이 있구나. 우리.
양사비의:학교도 몇 년째 같이 다니는건데. 오래 있었지. (하얀 것이 떨어진다. 벚꽃잎이다. 사방이 푸르고 보랗게 물든 사이로 하얗고 분홍빛의 꽃들이 만개할 채비를 마쳤다.)
그런 와중에 너랑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데이트도 해버릴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고.
위림: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근데 그거 알지, 원래 소꿉친구가 애인으로 더 좋은 거. (비밀 얘기하듯 비의의 귓가에 소근거린다.)
집도 바래다줘, 학교도 같이 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도 다 알고… 애인으로 이만한 사람도 없을걸. (말끝은 언제나 웃음이다. 높이를 맞추느라 기울였던 몸을 곧게 세우고 마주본다. 바람이 한 번 가볍게 나부끼면, 틈새로 벚꽃잎이 소복하게 흩날린다.)
양사비의:…… (꽃잎이 흩날리는 사이로, 대뜸 손을 네 앞으로 내밀었다.)
잡아줘.
잡고 돌아가자.
위림:(비어있던 손이 움찔, 떨린다. 조심스레 손을 뻗는다. 쉽게 깨지는 유리를 만지는 것처럼 천천히 손끝부터 닿은 뒤에야 완전히 손바닥을 포갠다. 일련의 행동이 마치 살갗 안쪽까지 감각을 새기려는 듯이 지긋하다.)
(네 손자국이 남으면 좋겠다.) 놓기 싫어지면 어떡해? (내 손자국도 남으면 좋겠다.)
양사비의:(얼굴에 홍조가 핀다. 네 살갗을 이토록 뚜렷하고 느릿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 미지근하게 지내왔던 우리 사이에 온도가 번졌다. 연인이라는 이름의 온도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든가. 추현 삼촌도 오늘 안 오는데.
위림:(맞잡은 손이 뜨겁다. 이토록 미지근한 손이 없는데, 마주 닿은 살갗에서 애정이 피어오르니 저절로 열이 난다. 더 데이고 싶다.) 혼자 있는 집에 남자를 그렇게 막 들여도 돼?
양사비의:(옛날에는 나보다 키도 더 작았던 것 같은데. 몸도 빼빼 마르고. 내가 남자애 같았고, 네가 여자애 같았지. 그러니까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어. 내가 네 여자친구가 되고, 네가 내 남자친구가 되리라고.)
연애 달인이라며. 그러면 진도는 다 지켜주는 거 아니야? (눈동자를 굴려 너를 올려본다.)
위림:(당황하면서 뭔 그런 말을 하냐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대답에도 미동없이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흠,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진도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그냥 보내주는 수밖에…. 집에 놀러가는 건 나중에 할게.
양사비의:(입꼬리를 조용히 올려 미소를 그린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러든가', 하고 대답한다.) 진도는 차근히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야 나도 이것저것 미리 공부하고 알아보지.
위림:'남자친구와 오래 사귀는 101가지 방법'같은 거 볼 거 아니지? 학교 도서관에 있긴 하던데…. (누가 그런 허접한 책을 신청한 건진 모르겠지만, 하고 짧게 덧붙인다.)
그래도 너무 많이 공부해서 오지는 마. 능숙한 비의도 좋지만… 서투르고 부끄럽고 이상해서 쩔쩔매는 게 더 귀여울 것 같아. (짓궂게 웃는다.)
양사비의:그런 책도 있어? 읽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소리를 하면서 맞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가 느슨하게 풀어낸다.)
서투르고 부끄럽고 이상해서 쩔쩔매는…… (들려온 그대로를 읊어본다. 취향 참 고약하다.) 글쎄, 만약 진도가 뽀뽀 이상으로 나가면 확실히 그럴 것 같긴 하다.
위림:읽지 마, 그런 거. 읽을 시간에 뜨개질 해서 가디건이나 만들어줘. (비어있는 손으로 비의의 볼을 쿡쿡 찌른다.) 그럼 그런 얼굴은 졸업식 이후에나 볼 수 있겠네.
양사비의:(뺨을 찌르는 손가락을 깨무는 시늉을 한다.) 자기는 연애 달인이고, 나는 연애 허접인 채로 두려고?
펼쳐서 무슨 내용이 있는지 보기나 할래. 혹시 모르잖아. 정말 좋은 조언이 적혀있어서 장기적인 연애 및 결혼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거고.
위림:나랑 연애하면서 배우면 되지. 근데 너… 나랑…… 진짜 결혼까지 할 거야? (기대하는 얼굴로 바라본다.)
양사비의:'마지막' 사랑일 거라며.
결혼까지 할 포부로…… 한 말 아니었어?
위림:맞긴 하지만……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해 보려고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다. 겨우 진정한 뒤에야 손을 내리고 입술을 달싹인다.)
그렇게 들으니까 와닿는 게 달라서. 진짜 평생 같이 있는 거잖아…. (결국 참지 못하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양사비의:(입꼬리 올라가는 것 좀 봐. 냉랭한 인상의 흑발 자안 꽃미남이 이토록 감정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이 게임 세상에서 세 명도 채 아니 될 거다.)
(미미하게 홍조를 띄운 채로 물어본다.) 기분 좋아?
위림:(입술을 안쪽으로 가볍게 만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응. 좋아.
너 나이 들면 어떻게 되는지도 보고… 죽을 때까지 같이 있는 거잖아.
양사비의:(이렇게 순수하게 인정할 건 또 뭐람. 사람 설레게.)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언제부터 사귀게 되면 같이 늙고싶다고 생각했어?
위림:(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고민하는 기색이 어린다. 언제부터라고 콕 집을 수 있나. 애초에, 나는……)
(결국에 내놓는 답이라고는.) 모르겠어. 그냥 언제부턴가 그랬어.
나도 모르는 새에 스몄나봐.
양사비의:…….
(손은 여전히 붙잡은 채로 두어발자국 멀어진다.)
(순간 심장이 크게 뛴 탓이다. 몰라, 부끄러워. 스몄다는 표현은 또 뭐야. 창피해. 두근거려.)
(입술을 꼭 붙인 채로 아무말도 이어나가지 못한다.) …….
……바보.
위림:(그런 줄도 모르고, 더 멀어질새라 서둘러 폭을 좁힌다. 언제나 옆에 있고 싶다. 그 몇 십센티의 간격마저도 싫다.)
(다시 가까워진 비의의 낯을 가만 본다. 아, 사랑스럽다.) 바보 남자친구는 싫어?
양사비의:조, 조, ……
좋아서 곤란해…….
위림:(심장이 덜컹거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그대로 굳어버린다.) ……
(정말이지, 사랑은 뭘까. 심심한 거리도 같이 걸으니 좋고, 별 감흥 없던 벚꽃도 유난히 예뻐 보이고, 좋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사랑스럽고, 부끄러워하는 낯이 귀여워서…)
바, 바보는 너잖아. (말까지 더듬어버린다.)
양사비의:(얼굴이 붉어진다. 문장을 더듬으며 반박했다.) 나는, 왜, 바보야?
남, 남자친구 좋다고 한 게… 바보야?
위림:누가 남자친구 좋다는 말을 그렇게…… (귀엽게 하냐고.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던 말을 무심코 뱉을 뻔하다가, 급하게 삼킨다.)
(한 손으로 마른세수나 한 번 한다.) 됐어, 아무튼 너 바보야.
양사비의:둘 다 바보해. 그러면. 이러면 공평하지? (괜히 잡은 손이나 꼼지락댄다.)
위림:알았어. 바보 커플 해. 애칭도 바보로 하자. (꼼지락거리는 손도 괜히 낯부끄럽다. 움직이지 못하게 깍지 껴 잡아버린다.)
양사비의:(아, 진짜 사귀는 것 같아. 손가락 사이사이에 네가 들어차면 이제는 부정할 수도 없이 얼굴이 토마토가 되어버린다.)
바보 림. (그리고 바보 비의. 이 벚꽃길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
위림:(그래, 바보 림이다. 그리고 넌,) 바보 비의. (좋아할 수밖에 없는 바보.)
(발갛게 달아오른 비의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문득 제 얼굴에도 미미하게 열이 올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바보 아니랄까봐, 얼굴도 토마토 같고… (제 뺨도 달아올랐다는 걸 들키기 싫어 괜히 고개를 슬쩍 돌린다.)
양사비의:자기도 홍당무면서……. (틱틱대면서도 한가지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너는 나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겠구나. 낯설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는 이 달콤한 간지러움.)
위림:너만큼은 아니거든. 얼굴 터지기 직전이면서… (봄바람은 뺨을 , 우리 사이에 감도는 기류는 마음을 간지럽힌다. 행복하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즐거워. 이대로 계속 걷고 싶다.)
(그러나 언제나 제 바람은 세상과 비껴서, 어느덧 흰색 지붕 집에 가까워진다. 일부러 걸음을 조금 늦춰봐도 끝내 다다르게 된다.)
(걷는 동안 새하얀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벚꽃잎을 조심스레 떼낸다. 현관 앞에 서서 비의를 바라본다.)
가기 싫은데 내가 눈물 꾹 참고 가는 거야. 알지? 내일도 볼 거니까….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해주고, 불현듯…)
(뺨에 스치듯 입 맞춘다.) 잘 자, 바보 여자친구.
양사비의:…… (헤어지기 싫다는 마음도 똑같아. 해가 좀 더 길었으면 하는 바람부터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꿈도 그렸을 거야. 네 보랏빛 눈동자에 그렇게 적혀있었거든.)
(그러니까 달리 말하자면, 나는 이런 부분에서는 성숙하게, ─널 달래는 방법은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안녕, 내일 봐' 하고 얘기하려 했었어. 뺨에 입술이 닿기 전까지는.)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소리도 못내고 눈꺼풀만 빠르게 여닫는 사이로 네가 잘 자라는 인사만 남기고 사라진다.)
(입술 감촉이 남은 뺨을 문지르다가, 그대로 휴대폰을 들어서 문자를 남긴다.)
[잘 자, 바보 남자친구.]
(고민하다가 한 통 더 보냈다.)
양사비의:[뽀뽀했으니까 평생 책임지는거 잊지말고]
오전까지는 그저 같은 반의 친구와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게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이보다 더 가슴 떨리고 간지러운 날이 또 있을까요.
제정신으로 저지를 수 없는 짓을 벌인 친구는 어느새 '남자친구'가 되어있었고…
헤어질 때는 뺨에 뽀뽀까지 받았죠. 이상하고 간지러운 하루입니다.
집과 집 사이의 가로수에서 꽃잎이 떨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 새하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야말로 봄인 풍경이었고, 위림과 함께 봄의 한복판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방이 적막한 것은 다들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라 그런 걸까요, 아니면 위림과 더 오래 함께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이러나 저러나, 이 집만큼은 당신만의 일상의 공간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식사를 해도 좋고, 방에 가 쉬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양사비의:(집에 들어가자마자 계획을 세운다. 답 문자에 신경쓰게 될까봐 일부러 휴대폰은 엎어놓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씻고 나와서 자기 전까지 뜨개질을 하다가 자면 되겠다.)
(간단한 결심이 서자 그 뒤로는 돌아보지도 않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향한다.)
(옷을 벗고,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도 네 입술이 닿은 뺨을 매만진다. 자국이 사라지면 어떡하지, 내일 또 찍어달라고할까. 실없는 생각을 이어가다보면 샤워도 빠르게 끝난다.)
(머리를 얼추 말리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뽀송해진 채로 뜨갯거리를 챙겨 방으로 올라갔다.)
개운하고 따뜻하기까지 하니 기분이 좋습니다!
마침 위림한테 문자도 한 통 와 있네요.
양사비의:(퍼드득 놀라며 당장 문자를 확인한다.)
위림:[졸업하면 식장부터 잡으려고 ㅎㅎ]
양사비의:(그 문자를 지긋…하게 바라보다가, 결국은 문자보관함에 넣어버린다. 오래오래 두고 봐야지.)
[집에는 잘 들어갔어?]
위림:[응]
[근데 집에 혼자 가려니까 쓸쓸해서 싫더라]
양사비의:[다음에는 내가 네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올게]
위림:[약속]
양사비의:[ (늠름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곰 이모티콘) ]
[내일 만나는 것도 내가 네 집으로 갈까?]
위림:[아냐 네 집으로 갈래 난 그게 더 좋아]
[빨리 자 피곤할텐데]
양사비의:[응. 그래야지.]
[너도 잘자]
[많이 좋아해]
위림:[나도]
[내 꿈 꿔 바보 여자친구]
양사비의:(휴대폰을 내려두고 낮에 뜨던 코스터를 꺼내든다. 조금만 더 뜨면 되니까. 완성하는 즉시 누워서 자야지.)
(코바늘이 움직인다. 털실이 매듭이 되고, 그 매듭이 점점 꽃모양에 가까워질 수록 네 모습이 내 안에서 선명해진다. 바보 림. 코스터를 받고 좋아해야 할텐데.)
동그란 털실에 가까웠던 코스터가 어느덧 꽃 모양이 됐습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뜨개질을 했더니, 벌써 잘 시간이 다 됐네요.
노곤한 것 같기도 하고… 슬슬 잠을 청할까요?
양사비의:(코스터를 다 뜨고나면 완성된 것을 협탁 위에 잘 올려둔다. 그 다음 잘 채비를 마치고 침대에 몸을 묻는다. 림, 위림. 자기 전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 뿐이다.)
오늘 하루도 온통 위림 뿐이었는데, 졸음이 몰려와도 여전합니다.
순식간에 눈꺼풀이 무거워집니다.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방학식이 있었고, 앞으로 일주일간 방학입니다.
푹 자버려도 상관은 없을 겁니다.
... ...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요?
꿈결을 헤매며 뒤척이고 있을 무렵,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비의, 듣기 판정!
양사비의: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80
판정결과: 실패
희미한 꿈속, 일그러진 소리가 들려옵니다.
악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애원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평범한 대화에서 느낄 수 있는 높낮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방향을 따라 걸어볼까요?
양사비의:(꿈? ……요즘 유행하는 루시드 드림인가, 뭔가 하는 그거인가. 의식이 몽롱하게 남은 채로 꿈 속의 상황을 인식하는 기분도 참 미묘하다.)
(일그러진 소리를 따라 본능적으로 걸어갔다.)
몸은 침대 위에 누워있을 테지만, 정신만큼은 소리를 따라 발을 옮겨갑니다.
저 너머에서 한 장면이 보입니다.
흔한 봄입니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그 틈새로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팔랑, 팔랑, 벚꽃이 떨어집니다.
비의, 듣기 판정!
양사비의: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저 너머에 누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나란히 등교하던 두 사람의 기로를 가로막고, 한 사람의 팔을 움켜쥐더니 외칩니다.
"아니잖아…"
"분명 어제는 겨울이었고, 우리는 끝까지 행복하겠다고 했잖아. 네가 내게 말했잖아!"
"변하지 않을 거라고 네가 고개도 끄덕였잖아……"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걸어갑니다.
소란이 일어나는데도 모두 즐거운 아침을 보내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팔이 붙잡힌 사람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쳐버립니다.
반대 손을 애초부터 잡고 있었던 대상과 나란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군요.
따뜻한 봄, 다정한 봄.
그야말로 로맨스의 시작입니다.
위림만을 제외한 로맨스.
비의, ◼◼◼ 1D15 상승합니다!
양사비의:7
7 상승합니다!
아, 이건 분명 이상한 꿈입니다.
어떤 시선도 받지 못하는 위림이 등굣길 한복판에서 망연자실한 얼굴로 멈춰선 모습이라니.
문장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이 아닌가요?
이런 풍경을 그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Chapter 3. 꿈은 끝나지 않지만
간밤에 꾸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이곳은 로맨스로 이루어진 세상, 분홍색 벚꽃마저도 사랑스럽게 날아다니는 곳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위림이 선택을 받기는커녕,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꿈이라니.
어째서 일어날 수 없는 일 따위를 꾸었을까요. 괜히 기분만 찝찝해집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나요?
비의, 듣기 판정!
양사비의: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65
판정결과: 실패
초인종 소리가 울립니다.
누군가 방문한 걸까요?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른 아침에 무슨 일인지…
양사비의:(비몽사몽 일어난다. 휴대폰을 들어서 시간을 확인해본다. 몇 시지?)
오전 10시를 막 넘겼습니다.
양사비의:(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주 이른 아침도 아니구나. 실내 슬리퍼에 발을 넣고 일어나면 떨쳐내지 못한 꿈의 잔상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어딘가 이상하다. 밑으로 내려가 문을 바로 열지 않고, 문 위의 외시경으로 바깥부터 살펴본다.)
외시경으로 보이는 바깥에는…
남색의 정돈된 정복 차림이 눈에 띱니다.
경찰입니다.
경찰이 여기는 왜 온 걸까요?
양사비의:(몸이 굳는다. 없는 척 할까. 어떡하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새하얘지지만 저 사람들이 쉬이 물러나지는 않을 것 같다. 노골적으로 피한다면 더 수상쩍게 여겨지지 않으려나.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연다.) 무슨 일이신가요?
경찰:안녕하십니까. 며칠 전에 학교에서 추락사한 학생 때문에 조사차 나왔습니다.
피해자와 같은 학교인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고 있는데, 피해자는 평소 어떤 학생이었나요?
양사비의:아, 네. (당연히 그 문제구나. 올 게 왔구나 싶어 그런지, 정작 경찰을 맞닥뜨리니 크게 동요하지 않게 된다. 설령 일이 가장 최악으로 치닫는대도 나는 위림이를 기다려주기로 했으니까.)
저는…… 그 아이랑 친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운데…….
그래도 모두가 좋아하던 아이었어요. 성격도 좋았고, 살가웠고, 학교 생활에 매번 열심히 임했으니까…….
그 애랑… 친하지 않았던 제가 보기에도, 정말 활기차고 성실한 아이었다고 생각해요.
경찰:아, 그렇습니까. (들고 온 노트에 비의가 말한 것들을 간단히 적는다.) 사이가 안 좋았던 친구도 딱히 없었고요?
양사비의:(고개를 끄덕거린다.)
경찰:(노트 한켠에 X 표시를 한다.) 어제는 뭘 하셨습니까?
양사비의:어제요? (눈을 깜박거린다.)
어제는 그냥 바깥에 나가서 뜨개질을 했어요. 청위 카페라는 곳에서요. 해가 질 때까지 그곳에서 있다가 돌아왔고요.
질문과 대답이 오갈 무렵, 바로 옆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목소리가 울립니다.
위림:얘는 걔랑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고개를 돌려보면 그곳에는 위림이 있습니다.
경찰은 위림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지만, 아무 흐트러짐도 없이 대답합니다.
위림:아, 저도 걔랑 아무 사이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같은 반 친구였어서 얘도 저도 잘 몰라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기엔 어폐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큰 모순이 있지요.
경찰에게 이를 고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이 또한 지나갈 일일 테니 침묵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양사비의:(그저 가만히 있는다. 괜히 말을 더하는 것보다 함묵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했다.)
기실 보편적인 시민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이 순간에 해야 할 행동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건 아주 모범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옆에 서있는 이가 사람을 밀쳤다고.
게임 속 세상이라 하더라도 당신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나요?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범죄자가 있고, 그들을 잡는 건 바로 경찰입니다.
시민으로서 진실된 이야기를 할 의무가 있을 텐데, 정작 다른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이유를 알겠나요?
당신과 위림의 답변을 들은 경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섭니다.
그리고, 위림은 언제부턴가 아주 조용히 당신의 손을 잡고 있습니다.
위림:자, 경찰 아저씨도 갔겠다… 오늘은 너희 집에 있어도 돼?
양사비의:…….
(토라진 척을 한다.) 몰라.
맘대로 해.
위림:왜 그런 표정이야, 응? 바보 남자친구 왔는데 그럴 거야? (부러 얼굴 앞에서 기웃댄다.)
양사비의:(주변을 돌아본다. 경찰이 가는 척 해놓고 지금도 사실 다 지켜보고 있으면 어떡하지. 지레 그런 불안부터 느껴진다.)
일, 일단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누가 듣고 있으면 어떡해. (여전히 '그런' 표정으로 조용히 속삭인다.)
위림:뭐 어때,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랑 같이 있겠다는데. 경찰 아저씨도 별 생각 없을걸. (소근거리는 탓에 가까워진 뺨에 기습적으로 가볍게 입 맞춘다. 열린 현관문 틈으로 도망가듯 먼저 들어가버린다.)
양사비의:(화들짝 놀란다. 조금 얼이 빠져있다가 뒤늦게 따라들어간다.)
…… (따라들어가자마자 현관문을 닫았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표정이 어둡다.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마음이 이상해. 너랑 여기에서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게 정말 맞는걸까?
위림:(먼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선 채다. 비의를 기다리려고 반쯤 뒤돌아 선 모습으로 어두운 낯을 가만 응시한다.) 옥상에서 있었던 일 신경쓰여서 그래?
양사비의:(차마 바로 앞의 사람을 바라보지 못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답했다.) 경찰까지 왔잖아. 그 자리에서 내가 널 고발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위림:(그제야 완전히 비의를 보고 선다. 네 걸음 정도 떨어져있던 폭을 좁힌다.) 네가 선택한 건데, 내가 뭘 더 어떻게 하겠어. 어쩔 수 없었겠지.
그리고 네가 각오했다고 했으니까… 잡혀갔어도 기다려줄 거 아니었어? 난 그걸로도 충분했는데.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다.) 혼자 남을 바보 여자친구가 걱정되긴 했겠네.
양사비의:……
안아줘.
나 무서웠단 말야. …
위림:(곧장 품에 안는다. 빈틈없이 온몸으로 껴안는다.) 미안, 나 때문에.
아무 일 없을 거야. 나도 어디 안 갈게. (흰 머리칼을 천천히 손으로 쓸어내린다. 안심시키려는 듯, 지긋한 손길이다.)
양사비의:…… (네 품에 들어가서야 안정을 느낀다. 이제야 걱정들이 녹아가고 어떻게든 되리라는 근거없는 낙관이 자리를 채운다.)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어. 그냥 이대로 별 일 없이 고등학교 졸업해서, 너랑 평범하게 지내고 싶단 말야….
위림:그렇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 (머리칼을 쓸던 손은 어느덧 등으로 내려가 가볍게 도닥이는 손길이 된다.) 졸업하고 나랑 결혼식 준비하러 갈 거잖아, 그치? (기분을 풀어주려는 심산으로 부러 웃음기 섞어 말한다.)
양사비의:…응. 그럴거야.
그나저나, 오늘은 뭐하러 왔어? (품에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한다. 눈을 마주할만큼의 침착함을 되찾았다는 뜻이다.)
위림:(새하얀 눈과 시선이 맞기만 하면 웃음이 샌다.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가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의 의미를 안다.) 당연히… 데이트 아니겠어? 오늘은 너네 집에 있을래.
양사비의:(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시선으로 진득하게 너를 본다…….)
위림:(조용히 마주본다…) …….
왜 그렇게 봐?
양사비의:이럴 거면 그냥, 어제 우리집에 와서 잤어도 좋았잖아.
오늘도 하루종일 집에 둘이 있을 건데.
위림:사귄지 첫 날에 어떻게 바로 여자친구 집에 가서 자.
어제 자기 전까지 후회하긴 했어. 그냥 가서 잘걸, 하고.
양사비의:(이 품에 안겨서, 네 목소리를 들으니까 조금은 웃음을 그리게 된다.)
아침은…… 먹었어? 차려줄까?
위림:(이 웃는 얼굴이 좋다. 짙지 않게, 입꼬리만 가볍게 당겨 웃는 흐린 미소가 유난히 잘 어울려서…. 자신의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모른다.) 너 아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
양사비의:조금만 더 충전하고…… (답지않게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 마음이 놀랐기 때문이라고 애써 변명한 다음, 속내로 셋을 세고 떨어진다.)
뭐 먹고싶은 건 없고?
위림:바보. (기분이 너무 좋을 때마다 습관처럼 뱉는 말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진정되진 않는다. 비의가 품에서 벗어나면 그 대신 한쪽 손을 깍지 껴 잡는다.) 나야, 네가 해준 거면 다 좋지.
그래도 반찬으로 야채만 있는 건 좀….
양사비의:흠, 그러면 베이글 구워서 소세지랑 같이 줘야겠다. 아침부터 너무 거창하게 먹기는 좀 그러니까. (손깍지를 단단히 잡은 채로 같이 부엌에 간다. 집에 남은 샐러드가 있고, 레토르트 스프도 있으니까 그것도 같이 끓이면 되겠지. 일은 덮어지지 않았지만 당장 우리가 같이 보낼 오늘은 이렇게 이어질 테니까.)
(아침의 일에 붙들리지 않기로 했다. 하물며 기이하리만치 선명하게 기억하는 꿈까지도.)
위림:브런치 메뉴로 딱이네. 역시 센스 좋다니까. (부엌에 다다르면, 식탁 앞에 놓인 의자 중에서도 요리하는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의자에 앉는다. 아침의 일도, 옥상에서의 일도 자신에겐 전부 뒷전이다. 네가 어떻게 요리하고, 요리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보고 싶다. 오로지 그것만을 상상하고 싶었다.) 갑자기 배고픈 것 같아.
양사비의:참나. (말은 그렇게 뱉었지만 웃음이 잔잔히 번진걸 보면 싫은 기분은 아니다. 한쪽에 걸린 단색 앞치마를 메고 후라이팬부터 꺼내든다.)
(버터를 녹이고, 베이글을 반으로 가른다. 녹인 버터에 베이글의 단면을 굽는 동안 샐러드를 꺼내고 물을 끓였다. 구워진 베이글을 옮겨 담고 그 위로 식용유를 가볍게 두른 뒤 소세지를 굽는다. 끓인 물에는 레토르트 스프가루를 타고, 식탁 위에 식기를 놓으며 아침 준비를 마쳐간다.)
(상대가 곁에 있다는 것도 신경 쓸 겨를 없이 내리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릇을 전부 식탁 위에 옮겨놓다가 자그마한 탄식을 뱉었다.) 아, …커피는 믹스 커피 밖에 없는데, 괜찮아?
위림:(역시, 요리 잘하네. 능숙하고. 혼자 있을 때는 지금보다 덜 바쁘겠지. 아침엔 보통 뭘 먹으려나. 샐러드에 시리얼? 아니면 역시 밥인가…. 맛있는 냄새 난다. 요리 잘 하니까 분명 맛있겠지─따위의 시덥잖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가정에 다다른다.)
(정말 결혼하면, 같이 살게 되면, 이것도 매일 볼 수 있는 풍경인가? 하는, 일러도 너무 이른 가정.)
(매일 아침 이렇게 함께하는 삶은 행복하겠지, 분명……. 식탁에 턱을 괸다. 더없이 행복하고 좋은 미래를 그리는데도, 고개가 점점 식탁 쪽으로 기운다. 서서히 좀먹어오는 음울 탓이다. 같이 살고 싶다.)
(그 탓에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졸다 깬 사람처럼 뒤늦게 고개를 든다.) 아, 그럼. 당연하지. 나 믹스 커피도 잘 먹어.
양사비의:잘 됐네. 다행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한다지만, 너 역시 정말 말끔하게 괜찮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한손으로 네 얼굴을 가볍게 쓸어준 다음에 믹스 커피를 타러 간다.)
(하나는 커피, 다른 하나는 우유. 그렇게 두 잔까지 식탁 위에 대령하고서야 아침 준비가 끝난다.) 이제 먹자.
위림:(비의의 손길이 닿았을 뿐인데,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어지고 평소의 짓궂은 표정으로 돌아온다. 그래, 곁에 있으니까. 함께니까…. 그걸로 됐어.)
(앞에 놓인 음식에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난다. 음식 냄새를 맡자마자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속이 공복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고마워, 잘 먹을게.
양사비의:(의자를 끌어서 자리에 앉는다. 크림치즈를 베이글에 바르면서 입을 연다.) 어제 나랑 문자 끝나고 뭐하다가 잤어?
위림:(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달큰하고 따뜻한 감각이 번져 절로 아늑해진다.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있다가, 비의의 질문에 곧장 장난스럽게 변한다.) 뭐하긴, 당연히 비의 생각 했지.
양사비의:…….
자기 전까지, 쭉?
위림:자기 전까지, 쭉.
양사비의:아, 나 진짜. (크림치즈를 바르던 나이프를 내려놓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다가 만다. 열이 올랐다.)
원래 연애라는 거 다 이래? 진짜 하나하나가 다 기쁘고 다 부끄러워….
위림:(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다. 아, 어쩜 부끄러워하는 것도 이렇게 귀여워서는……) 어때, 행복한 것 같아?
난 온통 네 생각만 해도 되니까 너무 행복해.
양사비의:매일매일 이렇게 살면 심장에 부담갈 것 같아. …
꼭, 뭐랄까. 행복해. 살면서 이런 행복이 내게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낯설기도 하고.
(나, 다른 사람한테 음식을 만들어주는 게 좋은가봐. 네가 먹을 음식이라고 생각하니 귀찮지도 않고 기대되기만 했더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긴 깨달음을 베이글과 함께 우물우물 삼킨다.)
위림:나만 행복한 게 아니라니까 더 좋네. (포크가 베이글과 소세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소세지로 향한다. 나이프로 먹기 좋게 썬다.) 혼자 행복한 건 좀 그렇잖아. 그래도 같이 있는데.
계속 이렇게 행복하면 좋겠어. (차마 밖으로 뱉을 수 없는 많은 말들을 아침 식사로 틀어막는다. 소세지를 한 입 먹는다.) 잘 구워졌네, 소세지.
양사비의:꼭…… 그렇게 안 될 가능성도 상정해둔 것처럼 이야기를 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얘기했던 건 너면서. (소세지가 잘 구워졌다는 말에는 흐린 웃음만 머금고 흘려보냈다.)
앞으로 밥 먹으러 종종 우리집 놀러와. 요리해줄게.
위림:당연히 그럴 거지만, 이렇게 얘기하면 느낌이 또 다르잖아. 내가 너랑 있는게 얼마나 좋은지 티도 낼 수 있구. (말끝에 웃음이 따라붙는다.)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건데, 계속 낯설어할 거 아니지? 종종 놀러올 게 아니라 눌러앉아야 하는 거 아냐? (그새 기분이 들떠 목소리가 높다.)
양사비의:눌러앉으면…… 삼촌이 놀라기는 하겠다. (싫어하려나? 어른도 안 된 애들이 동거 비스무리한 게 웬말이냐며 목에 핏대를 세울 거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묘하게 완고한 사람이니까. 우유를 몇 모금 마셔놓고 컵을 내려두면 인중에 우유 수염이 생긴다. 손으로 문대 없앤다.)
삼촌한테 뭐라고 얘기하는 게 좋으려나. 남자친구라서 자주 놀러오게 됐다? 빈방도 있으니까 종종 자고 갔으면 좋겠다? 이상한…… 그런 건 어른이 될 때까지는 안 할거다?
위림:(비의의 얘기를 들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사레들린다. 연신 기침하다가 진정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삼촌께서 무슨 표정 지으실까, 그런 얘기 하면…… 발랑 까진 건 아니라 다행이라고 하시려나……
양사비의:괜, 괜찮아? 물 떠다줄까? (지레 놀라서 눈을 크게 뜬다.)
위림:아냐, 됐어. 진정했어. (우유 한 모금 들이킨다.) 남자친구는 안 된다고 하실 분은 아니시지?
양사비의:오히려 좋아하실 걸.
'너도 누구한테 관심을 주기는 하는구나', 하면서.
위림:그렇다면 다행이고. (베이글이 크림치즈를 바르다가,) 그러니까 궁금해지네. 비의는 내 어디가 좋아? 어쩌다가 좋아졌어?
양사비의:……보다가, 좋아졌어.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별 관심 없었어. 아마 너도 그랬겠지만. 너랑 나는 성격도 다르고, 어울리는 무리도 엄청 다르니까……
근데, 모르겠네. 나는 그렇게 관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네가 내심 내게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나봐.
정말 많이 다르니까 어떻게 다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말을 섞다보니까, 굳이 연인이 아니더라도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뭐든 다 좋았던 것 같아.
위림:(마음이나 생각을 확인한다는 건, 사실 내키지 않는다. 굳이 꼽자면 두려운 일 중 하나다.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니 지레 겁 먹게 되는 까닭이다. 겉으로만 판단하고 넘기는 게 가장 쉽고 편한 일이지만, 네겐 다르다.)
(무슨 마음인지 알고 싶고,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어진다. 네가 날 좋아한다는 확신 덕분인지는 몰라도, 너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대범해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뭐야, 그게… (괜히 낯부끄러워서 베이글에 크림치즈나 마저 바른다.)
(정말이지, 뭘까. 사랑이라는 건. 사람을 자꾸 이상하게 만든다.) 우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정반대라 다행이네. 똑같은 점이 많았으면 네가 이렇게까지 안 했을 것 같아. 처음에 마음은 잘 통했을지 몰라도….
내가 이런 사람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 처음으로.
양사비의:(가만히 듣는다. 스프가 식고 우유가 미지근해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네가 느끼는 간지러움의 아주 작은 파편이라면 나도 알 것 같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하나만큼은 같을 테니까, 우리.)
이전에는 그런 생각 안 했어?
'내 머리가 검고, 내 눈이 보랏빛이고, 내가 이런 외모에 이런 성격이라 다행이다'─ 그런 생각.
위림:안 했어, 한 번도. (베이글을 한 입 문다. 삼키고 나서야 마저 말을 잇는다.) 딱히 내가 좋았던 적이 없었어.
양사비의:(순수하게 질문한다.) 왜?
위림:글쎄…… 뭐라 콕 집어서 말하기 어렵네. 어쩌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 난.
그래서 너한테만이라도 좋은 사람이면 좋겠어.
양사비의:(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너를 향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림, 이리 와봐.
위림:(똑같이 몸을 기울인다.) 왜?
양사비의:(손을 뻗어서 입가에 묻은 베이글 가루를 털어줬다.) 좋은 사람이야. 물론…… 착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그래도 너는 내가 좋아하니까, 볼 수록 매력적인 좋은 사람은 맞아.
위림:(베이글 가루를 터는 손으로, 말을 읊조리는 가느다란 입술로, 온통 하얀 눈동자로 시선이 옮겨간다. 정작 네게서 좋은 사람이란 소릴 들으니 외려 낯부끄러워진다. 결국 뱉는 말이라곤 바보, 두 글자 뿐이다.)
……아무튼! 난 우리가 서로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양사비의:흠…… (얇고 가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는 시늉을 한다.) 나는 좋아해서 다행이라는 말은 아껴뒀다가 나중에 할래.
위림:왜? 나 때문에 자꾸 일 생겨서? (눈썹이 추욱 처진다.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결론은, 속상한 척이다.)
양사비의:(어쩐지 그런 직감이 스쳤다. 나는 너를 좋아해서 더없이 큰 재앙을 맞게될 지도 모른다고. 형체없이 막연한 감각이지만, 끈적하고 검은 파도가 발치에서 일렁이는 감각을 종종 느낀다.) 심술 좀 부릴래. 아침 일도 있었고.
위림:(좋아한다고 해줘, 하고 평소처럼 어리광을 부리려다가 심술이 길어질까봐 고개만 끄덕이고 만다. 행복하다고 했으니까. 그거면 충분하다. 베이글을 마저 한 입 먹다가, 슬쩍 눈을 마주본다.) …심술, 오래 부릴 거야?
양사비의:딱…… (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번 학년까지? 봄까지만? 갈 수록 심술을 부리려는 기간이 줄어든다.) 딱, 이번 봄방학까지만.
아무일 없이 둘이 같이 손잡고 등교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매일매일 얘기할게.
널 만나서 기쁘다, 행복하다. 사랑해서 정말 다행이다.
위림:(기쁘다, 행복하다, 사랑해서 다행이라고 내뱉는 말이 꼭 미래에 들을 대답을 미리 들은 것 같다. 웃음이 비실 샌다.) 뭐야, 오늘 밤까지로 줄여줘. 너무 길잖아. 나도 심술 많이 안 부렸는데 이럴 거야?
양사비의:오늘 밤까지는 너무 짧잖아. 이틀 뒤까지는 어때.
(반쯤 농담을 섞어서 말을 이어간다.) 이틀 뒤까지 아무일도 없으면, 매일 밤마다 '림이를 만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하늘에 기도도 할게.
위림:좋아, 내가 양보한다. 약속해줘. 매일 기도하기로. (짓궂은 미소를 띤 채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양사비의:(새끼손가락을 내건다. 엄지 지장까지 꼼꼼하게 찍었다.) 여하간, 오늘은 이렇게 집…… (잠깐 버퍼링이 걸렸다.) 데, 이트…… 하려고 온 거야?
위림:(꾸욱, 엄지 지장까지 마주 찍고 나서야 손을 뗀다.) 응. 너네 집에서 데이트. (한 글자씩 또박또박 얘기한다.)
양사비의:우리 집에 보드게임 같은 것도 없는데……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워야 할텐데. 숟가락으로 스프그릇의 바닥을 긁으며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본다.)
영화라도 볼까? 아니면, 그냥 낮잠이라도 같이 자거나…….
위림:꼭 그런 게 있어야 즐거운 법은 아니잖아. 난 너랑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어느덧 식기가 거의 비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영화 좋지. 소파에 둘이 딱 늘어붙어서 보다가 노곤하면 그대로 자면 되겠네.
양사비의:명색이 데, 이트니까…… 즐거우면, 좋겠단 말야. (멋쩍어서 말이 어물쩍다. 이윽고 방금까지의 대화를 환기하듯 테이블에서 일어나 빈 식기들을 하나둘 겹쳐쌓는다.)
먼저 거실로 가서 소파에 앉아있어. 금방 치우고 갈게.
위림:(데이트라고 할때마다 묘하게 더듬거리는 것마저도 마냥 귀엽다. 사랑스럽지 않은 부분이 없으니 큰일이다.) 뭘 해도 즐거울 테니까 걱정 마.
(여전히 식탁에 앉아 그릇을 치우는 모습을 가만 보다가, 네가 싱크대 쪽으로 그릇을 옮길 즈음에 일어나 슬쩍 뒤에서 껴안는다.) 여기 있으면 안 돼?
양사비의:(싱크대의 설거지통에 물을 받아 그릇을 넣으려던 찰나, 뒤부터 감싸안는 무게에 눈이 크게 떠진다.) ……
(부끄러워서 어떤 말도 못하겠다. 가열차게 낯이 뜨거워지는데, 이 감정을 언어로 구체화 하기에는 제 표현들은 너무 미숙하다. 그러니 그저 그대로, 가만히 너를 느낀다. 손을 뒤로 뻗어 네 뺨을 어루듯 쓰다듬기도 한다.)
……마음대로 해. 나도…… 네가 이러고 있으면, 좋아.
(읊조리듯 속삭이고는, 너를 등에 찰딱 붙인 채로 수세미를 들어 설거지를 시작한다.)
위림:(제 뺨을 쓰다듬는 손바닥에 뺨을 기댄다. 나를 거절하지 않는 손이, 거절할 수 없는 온기가 더없이 따스하다. 네가 닿을 때마다 모든 불안과 의심이 순식간에 걷히니, 내가 방향으로 삼을 건 너 하나 뿐이구나 싶다. 품 안 가득 들어찬 네가 영영 내 품 안에만 있으면 좋겠다, 영원히…)
(등에 가볍게 고개를 부린다. 꼭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나랑 있으면 좋아?
양사비의:응. (포크 두 개. 나이프 두 개. 컵도 두 개. 그 미묘한 차이가 함께한다는 것의 기쁨을 알려준다.)
너랑 있으면, 뭐랄까…… 누군가랑 같이 있어서 행복한 게 뭔지 알 것 같아.
항상 혼자 있었어서 그런가, 등에 무게가 얹히는 게 이렇게 포근한 줄 몰랐어.
위림:자주 혼자 있었으니까 둘이 있는 거 어색할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그럼 이제 매일 같이 있고 매일 안아줘야겠다. (고개를 부비던 그대로 가볍게 웃음을 흘리다가, 그대로 툭, 기대버린다.)
난 이제 혼자 있기 싫어.
둘이 있고 싶어.
양사비의:(그릇에 묻은 거품을 닦다가, 네 고개 위에 제 고개를 가볍게 얹는다.)
맨날 친구들이랑 놀러 다녔잖아. 그런데도 혼자 있는 기분이었어?
위림:언제나 동떨어진 기분이었으니까…. 집에서도 혼자고. 같이 있어줄 사람도 없고.
심심했어. 지루하고, 고루하고…. (빙빙 돌려 말하지만, 외롭다는 얘기다.)
양사비의:…… (속도를 내서 그릇을 닦는다. 물기를 털고 건조대 위에 그릇을 놓았다.)
설거지 빨리 끝내야겠다. 외로운 남자친구 안아주게.
위림:(그 말에 시시덕거린다.) 더 외로워지기 전에 빨리 안아줘. 난 안아주는 것도 좋지만 안기는 것도 좋아.
양사비의:(마지막으로 헹군 컵을 건조대 위에 얹고, 벽면에 걸린 수건에 손의 물기를 닦는다. 곧장 몸을 돌려 넓은 어깨를 와락 끌어안는다.) 외롭지마.
앞으로 이렇게, 많이 안아줄게.
위림:(마주 껴안아지면, 더없이 행복한 웃음이 번진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행복하다. 이런 게 사랑이구나, 이렇게 벅찰 만큼 아늑하고 다정하게 차오르는 게……)
(품 안에 들어온 몸을 힘주어 안는다. 맞닿는 감각을 피부 위로 새기다가, 가까워진 이마에 입 맞춘다.) 매일 외롭다고 어리광 부릴래.
양사비의:(또다시 입술의 감촉이 피부 위로 느껴지면, 부끄러움을 덕지덕지 붙인 얼굴로 빤히 쳐다본다.) ……잠깐만. 어리광 부리는 건 좋은데. ……뽀뽀는 아직 이른 것 같아. 우리 사이에서.
위림:(내려다본 낯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워서, 입술에 입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남들은 맨날 무던한 낯으로 있는 네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모르겠지.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는 가만 마주본다.) 이미 뺨에도 몇 번 했는데…, 싫어?
양사비의:그게 아니라, ...
(말을 더듬다가, 에라이, 쪽. 냅다 입술과 입술을 붙이고 고개를 떨어뜨린다.) 어떻게 진도를 조절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어서, ...
위림:(입술에 닿아온 감촉을 제때 받아들이기엔 인식이 늦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흰 눈동자만 바라보다가, 뒤늦게 미미하게 얼굴에 열기가 오른다. 부끄러움이 아니라, 오로지 기쁨만으로.) ……
(푹 숙인 낯을 마주보려고 따라 고개를 숙인다. 어렵게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야 입을 벙긋거린다.) ……또,
또… 하면 안 돼?
양사비의:(어깨를 더 단단히 감싸안아서, 둘 사이 틈이 손톱만큼도 없게 한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고, 발꿈치를 들어올리고 다시 입술을 포갠다. 두번째 입맞춤은 첫입맞춤보다 길다.) ……
……이거 봐. 한 번 하니까 계속 다른 것도 더 하고 싶어지잖아. (입술을 떨어뜨리고 속삭인다.)
위림:(입술이 다시 맞닿으면, 시간이 우리 입술 새에 갇힌 것 같다.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입맞춤이었는데, 찰나를 아주 길게 늘이고 또 이어붙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호흡하는 법을 잊고 있었던 탓에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모자란 숨을 들이킨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입을 벙긋거리다가, 작게 목소리를 낸다.) ……나랑 뭐 더 하고 싶은데?
양사비의:……비밀. (로맨스 영화를 보면 종종 나오는 게 있잖아. 너랑 그런 것들까지 하게 되면 어떤 감각이 자신을 집어삼킬까 궁금해진다. 네 어깨에 제 머리를 묻어 생각을 감춘다.)
위림:(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해준 뒤 천천히 쓰다듬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랑 어떤 게 하고 싶을까, 날 어떻게 생각할까…. 머리카락 틈을 천천히 헤집다보면, 손가락 틈새에 하얀 머리카락이 걸리는 만큼 욕심이 커진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거라곤 손을 맞잡고 끌어 소파로 향하는 것뿐이다.) 난 숨기는 거 없는 애인이 좋은데. (가벼운 농조.)
양사비의:(소파에 나란히 앉는다. 다리끼리 딱 맞닿아있는 것도 정도 이상으로 간지럽다. 시선을 돌릴 것이 필요했다. 냅다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러 둘 사이의 열기 따위를 완화시킬 소음을 만든다.) ……응큼한 거라서 안 돼.
위림:하는 건 쑥맥 같아서는 그런 생각이나 하고…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네 팔부터 어깨를 가볍게 간지럽힌다. 저 또한 마찬가지인 마음이지만, 시치미 뚝 떼고 놀린다.) 진짜 응큼하네.
양사비의:가, 간지러워. (팔을 제쪽으로 슥 거둔다. 언젠가부터 빨개진 얼굴이 가라앉지 않고 계속 뜨거워지기만 한다. 애써 시선을 화면 위에 얹으면, 고양이와 쥐가 서로를 못잡아먹어서 안달인 옛날 애니메이션이 보인다.) 티비나 봐. 만화영화 하고 있잖아.
위림:나 그런 거 볼 나이 지났는데. (그러면서도 시선은 얌전히 TV로 향한다. 네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가만 화면만 응시하고 있다가, 문득 손이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어 거둬간 손을 끌어와 깍지 껴 잡는다.)
양사비의:…… (고양이랑 쥐가 서로를 얼마나 참신하게 괴롭히는지는 차치하고, 모든 관심과 신경이 맞잡힌 손쪽으로 쏠린다. 비어있는 손으로 리모컨을 잡아 네게 넘겼다.) 보고싶은 거 찾아서 봐, 그러면. 안 응큼하고 건전하고 네 나이에 걸맞는 방송으로.
위림:(리모컨을 건네받자마자 고민하는 듯 손 안에서 이리저리 놀린다.) 차라리 응큼하고 불건전한 거 보자고 하면 쉬웠을 텐데. (옅게 웃는 소리를 내다가 뭐가 있으려나, 느지막이 중얼거리며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양사비의:…… (잠깐 아무말도 없다. 오래 지나지 않아 고개를 네쪽으로 돌린다.) 그런 거, 한 번 볼까……? 나 그런 영화 봐본 적 없어.
위림:진짜? (어디까지 대담해질 셈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동자만 굴려 바라본다.) 나도 본 적 없긴 한데, 그런 거….
이 시간에 있나, 그런 영화 방송해주는 곳이… (채널이 위쪽으로 쭉 올라간다.)
양사비의:보다가 너무 이상하면 채널 돌려도 되니까. (저 역시 네게 가볍게 기댔다.) 곧장 그런 말을 꺼내길래 응큼하고 불건전한 거 많이 본 줄 알았어, 너.
위림:관심 없어, 그런 거. 밤엔 채널 좀만 돌려도 많다더라. 애들이 그러던데. (시시덕거린다.)
양사비의:(……이렇게 훤한 시간에 그렇고 그런 걸 방송해주는 채널이 있을까?)
기준치: 44/22/8
굴림: 3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채널 숫자가 몇 번이나 바꼈을까요? [그 남자 그 여자의 속사정] 이라는 누가 봐도 성인용인 영화를 방영하는 채널까지 왔습니다.
위림:(오른쪽 모서리에 달려있는 19세 표시를 보고 뚝… 멈춘다. 진짜 있다고?)
(당황해도 내색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도 아직 손 잡고 데이트 하는 커플이 나오고 있고…) 이 시간에도 이런 걸 방영하는 채널이 있네….
양사비의:……. (당황해서 말이 멎는다. 기세등등하게 그런 말을 했어도, 정작 화면을 맞닥뜨리자니 당혹감이 넘실거렸다.)
(저쪽 화면에서도 손을 잡고 있고, 지금 여기에서도 손을 잡고있다. 물론 두 장면의 큰 차이점을 꼽자면 이 다음 이어질 것들이긴 한데…….)
(아직까지는 이상한 게 나오지 않으니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 화면 속 두 사람도 건전하게 연애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까지는.) ……어쩐지 지금, 너랑 나 둘이서 나쁜 짓 저지르는 느낌이야…….
위림:뭐 이런 걸로 나쁜 짓이야. 이 시간에 이런 걸 방영하는 채널이 나쁜 거지. (아무렇지 않은 척 말같지도 않은 궤변만 늘어놓는다. 능청스레 구는 겉과 달리 속에선 미세한 긴장감의 실이 당겨진다.)
그리고 지금은 데이트밖에 안 하는데? (싫어하면 돌리면 되지, 괜찮은 기색이면 그냥 보면 되는 거고. 그렇게 생각해도 직접 마주하자니 낯 뜨거워질 것 같은건 저도 매한가지라, 괜시리 마른 침만 한 번 삼켰다.)
양사비의:그건 그런데…… (아, 잠깐만. 데이트를 마친 두 사람이 자동차에 타더니, 그 시점부터 기류가 이상해진다. 화면 속 연인이 입술을 맞대는 순간에서 숨을 소리없이 들이키고, 행위가 점점 야릇하고 격렬해지면 긴장감에 몸이 굳어 미동도 없어진다.) ……
(자기는 이렇게 낯뜨거운데 지금 림은 어떤 표정인건지, 들키지 않게 눈동자만 돌려 흘긋거린다.)
위림:(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화면에서 눈을 떼자니 허접해보이고, 그렇다고 뚫어져라 보자니 변태처럼 보일 것 같다. 좋아하며 봐도 저질같고……. 끝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네 표정이 궁금해져서 시선을 돌리면, 서로 고요히 마주하는 모습이 된다.) …….
양사비의:…….
(아, 나는 네 모습을 조용히 훔쳐보고 싶었는데. 결국 내가 본 것은 네 눈동자에 비친 제 우스꽝스럽게 창피해하는 모습 뿐이다. 별다른 말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어, 음. 그게, 그러니까…….
우, 우리 이런 건 좀 더 사귄 다음에 볼까? (빈손이 더듬거리며 리모컨을 찾는다.) 생각보다 더 외설적이네, 직접 보는 건…….
위림:(기실 영화는 남의 애정행각은 정말 관심이 안 간다, 따위의 감상이 전부였다. 문제는 거기에 상대와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는 점이다. 언젠간 우리도 저런 짓을 하게 되는 걸까, 서로에게 맨살을 보이면서 서로를 어루만지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쩔 방법도 없이 낯이 뜨거워진다. 고개를 끄덕이고 정처없이 떠도는 손에 리모컨을 쥐여준다. TV에서 새나오는 숨소리와 좋아, 따위의 탄성은 못 들은 척한다.)
…근데, 진짜 나랑 저런 거 하고 싶었어? (다시 비의를 마주본다.)
양사비의:(화면은 이미 살색으로 가득하다. 터져나오는 교성을 무시하고 누구보다 재빠르고 바람과도 같이 채널을 돌린다. 방금 전의 건전한 만화영화가 다시금 화면을 채운다.) 아, 아니, 나는……. 나는, 그런 건 말고. 그냥 키스만…….
입술 뽀뽀 말고, 있잖아. ……그런 것만 생각했는데.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바닥만 진득하게 쳐다본다. 언젠가 우리도 하게 될까?─내면의 질문에 곧장 부정적인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는 걸 보면 내심 기대하고 있던 걸까. 잘 모르겠다. 그래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겠다.)
위림:네가 네 입으로 응큼하네 어쩌네, 영화도 먼저 보자고 그래서 나랑 저런 것까지 생각한 줄 알았지. (어쩐지, 너답지 않게 조급하다 싶었다. 만약 정말 거기까지 원했으면, 싫다고 했을까? 싫다고 할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 뭐, 아니라면 됐고. (아무래도 거기까지 생각한 나만 저질 된 것 같다. 이번엔 정말 부끄러워서 마주할 수가 없다. 자신도 비슷하게 시선을 사선으로 피한 채다.) 혹시 싶어서 말하는 거지만 저런 거 생각하고 집에 온 거 아니니까……
양사비의:(어쩐지 자신을 해명하듯 덧붙여지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네 낯을 빤히 쳐다본다. 부끄러워하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너도 이렇게 멋쩍을 때가 있구나.) …….
(잡힌 손도 놓고, 비어있는 손도 뻗는다. 양손으로 네 양뺨을 감싸 어루만졌다.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귀여워서 웃었다.) 알아. 너 점잖잖아.
위림:그렇게 마구잡이로 진도 빼는 남자친구는 나도 싫다고. (뺨에 네 손이 닿으니 더 마주볼 수가 없다. 미미하게 달아오른 낯으로 괜시리 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널 품에 껴안고 뒤로 확 넘어가버린다.)
(고개를 들지 못하게 뒤통수를 가볍게 누르며 쓰다듬는다. 마주하면 더 낯부끄러울 것 같아 아예 품에 가두길 택한다.) 잠깐만 이러고 있자.
양사비의:아, (뒤로 넘어가며 짤막한 신음을 흘린다. 방금 화면에서 카시트도 이렇게 넘어가며 외설적인 장면이 시작했던 것 같은데. 품에 가둬진 채로 숨을 멈췄다. 네가 그런 짓은 전혀 하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그래도 본 게 있다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댄다.) …….
(팔만 슬그머니 빼내서 네 몸을 조심스레 감싸안는다.) ……내 심장소리 다 들릴 것 같아. 이렇게 가까우면.
위림:(맞닿은 곳에서 옅게나마 박동이 느껴진다.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서 미세하게 웃음이 샌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도 대충 비슷한 구도였던 것 같은데……. 나름 미동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서서히 박동하기 시작한다. 콩닥거리는 소리가 내 소리인지, 네 소리인지 알 수 없어진다.) 다 들려.
대신 너도 나 그렇게 껴안으면, 내 심장소리도 다 들릴 걸. (부끄러워도 멈출 수 없다. 이 소리가 널 향한 애정의 방증이 되길 바랄 뿐.)
양사비의:응. 들려. (콩닥콩닥, 몸을 울리는 소리가 제 것 말고 다른 하나가 더 있다.) 이렇게 있는 거 좋은 것 같아….
림, 많이 좋아해. (다시 한번 읊는다.) 많이 좋아해.
위림:(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나도 좋아한다는 말은 부족하고,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하자면 끝이 없으니까. 말과 행동을 아무리 고르고 골라도 성에 차지 않는데…….)
(품 안에 들어온 몸을 힘주어 안는다. 박동하는 울림이 조금 더 가까워지고 깊어진다. 차라리 심장을 통해서 마음을 통째로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무슨 마음인지, 무슨 생각인지,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알려줄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대답이 늦어지는 새에 박동이 더 거세진다.)
나도, ……. 좋아해, 정말 많이. 아주 많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이제는 쿵쾅거리는 심장마저도 널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양사비의:(말이 가슴을 적신다. 가장 깊은 안쪽까지 네게 스며들어 이제는 온통 너뿐인 것 같다. 아, 이 세상에서 가장 별 볼 일 없던 존재에게 이렇게 큰 기쁨이 주어져도 되는가. 네 감정은 나를 끝도 없이 오만하게 만든다.) …….
(묻어두고 있는 것을 외면하고, 미안한 이를 지워버린다. 나는 네 옆에 있는 게 좋다.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나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으면 좋겠어.) ……뽀뽀, 해줄래?
위림:(오로지 둘만 존재하는 세상이면 좋겠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서로만 바라보면서 살 수 있게. 나는 네 곁에 있고, 너는 네 곁에 있고. 그게 합당하고 지당하며 우리 세상의 전부가 되는……)
(사랑은 사람을 이기적이게 만들어서, 너랑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뭐든지 몇 번이고 저지를 수 있다. 그런데도 정작 너랑 맞닿는 일은 언제나 가슴 떨리고 조심스럽다. 처음엔 머리카락 위로, 그 뒤엔 이마로.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떼 네가 고개를 들면 입술 위에 세심히 입 맞춘다.)
……, 더 해줘? (대답할 때까지 가만 바라본다.)
양사비의:(이상하다. 나는 한낱 '캐릭터'에 불과할텐데도. 이렇게 사랑을 받고있다보면 내가 납작한 인형 그 이상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나한테도 이렇게 벅찬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마음이 있었던가?)
(머리카락과 이마, 그리고 입술에 부드럽게 떨어지는 입맞춤을 받는다. 수줍게 웃었다.) 응. 한번 더.
위림:(부끄럽다는 듯이 웃는 미소가 사랑스럽다. 맞닿은 온기가 포근하다. 나도 이렇게까지 행복할 수 있구나, 서로를 오롯이 사랑하면서….)
(이번엔 콧잔등에서 뺨으로 향한다. 그리고 다시 입술과 입술을 포갠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긴 입맞춤이다. 입술을 떼고 나면 넘치는 행복 탓에 웃음이 샌다.) 또?
양사비의:(이제 만족했나, 아니, 아직 아니다. 떨어지지 말았으면 하는 양팔이 널 단단히 붙든다. 네가 좋아서 끊임없이 너를 원하게 된다. 숨결이 바로닿는 거리에서 속삭인다.) 한번만 더. 응?
위림:(바짝 가까워진 거리에서 숨결이 한데 섞인다.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을, 그걸 따라 축 늘어진 눈매를, 온통 흰 눈동자와 얇은 입술까지 차근히 시야에 새기면 어느새 내 전부는 너를 향해있다.)
(등에 닿아있던 손으로 단단히 너를 감싸안는다. 입 맞춰달라 조르는 목소리마저도 사랑스러워서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고 싶어진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한 거리에서 잘게 웃다가, 다시 입 맞춘다.)
양사비의:(아랫입술을 옴죽거렸다. 진득한 키스는 못되지만, 포개어진 입술 사이를 잘게 훔친다. 이제 만족했나. 만족은 아니더라도 욕심을 참아낼만큼 너를 내 안에 가득 담은 것 같다.)
(고개 사이가 멀어져도 코끝은 맞닿게한다. 말소리에는 웃음이 스몄다.) 뽀뽀하느라 하루를 다 보내버릴 것 같아.
위림:(마음 안쪽에서 따뜻한 물이 넘실거리는 것 같다. 지나치리만큼 설레고 들뜬다. 둘만이서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 기쁜 탓에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네 코끝을 깨물 것처럼 굴다가도, 도로 맞대고 부비적거린다.) 그럼 행복하긴 하겠다. 심심할 때마다 뽀뽀나 할까?
양사비의:참나. (결국 작은 웃음소리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고개를 좀 더 가까이 붙이면 둘 모두의 코가 우스꽝스럽게 눌러졌다.)
'뽀뽀만' 할 수 있어? 나는 욕심도 더 내버릴 것 같아서 조금 무서운데…….
위림:(그마저도 마냥 좋아서 소리 내 웃고 만다.) 네가 욕심내는 거에 맞출 거야. 말했잖아, 마구잡이로 진도 빼는 남자친구는 싫다고.
근데 네가 욕심 안 내는데 난 욕심나면……, 몰라, 뽀뽀만 하면서 참을 거야.
양사비의:(고개를 올린다. 몰라. 다 모르겠다. 이제 엑스트라고 주인공이고. 당장 이 손 닿는 곳에 네가 있다. 네가 너무 소중하고 거대해서 나의 역할이나 용도 따위는 전부 중요하지 않은 무언가가 된다.)
(네 뺨에 입을 맞추고, 턱에 입을 맞추고, 아랫입술에 입을 맞추는 척 하면서 하순을 가볍게 베어문다. 표현하는 욕심의 의미는 사실상 명확하다.) ……
위림:(처음 입 맞출 때까지만 해도 쑥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던 게 얼마 전인데, 먼저 입 맞춰오는 게 낯설고도 기쁘다. 너도 나를 그만큼 원하는 것 같아서, 나만 너를 원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우리가 같은 마음인 게 다행이고 행복해서….) 응큼해. (이끌리듯 입 맞춘다.)
양사비의:(물론 자기의 욕심이 응큼하기는 해도, 응큼하게 만든 게 누구인데. 항변하고 싶은 언어들은 포개어지는 입술 안쪽으로 감춰진다.)
(머리 안쪽이 새하얘지고, 남는 것은 네 감촉 뿐이다. 어딘가의 표현처럼 달지는 않아도 부드럽고 말랑하다. 호흡은 습하고 따듯하다. 드라마에서 으레 보았듯 눈을 사근히 감았다. 입술 사이도 벌리다 앙 다물어 농밀한 입맞춤을 따라해본다.)
위림:(온 신경과 마음이 네게로 쏟아진다. 네가 욕심내는 게 좋다. 나를 바라고 원하는 걸 받아낼 수 있어서 기쁘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 뒤로 열기어린 숨결을 느낀다. 아랫입술을 입술로 가볍게 베어물고,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작은 틈마저도 입술 새로 숨겨버린다.)
(난 너만 있으면 돼, 너만 원해, 평생 함께하고 싶어…. 목 안쪽에서 아우성치는 목소리를 전하는 대신 네 뒤통수를 가볍게 감싸 더 깊게 입 맞춘다.)
양사비의:(풋풋하던 입맞춤이 점점 대담해진다. 호흡이 가빠졌다. 뽀뽀야 짧은 '쪽' 소리 다음에 떼면 된다지만, 키스는 언제 멈춰야 좋은 걸까? 네 옷깃을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숨이 가쁘다. 의도하지 않은 헐떡임과 아주 가냘픈 비음이 흐른다. 밀착한 몸 사이를 오고가는 숨결이 못 견딜만큼 뜨거워졌을 때, 질척한 타액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히 귓가를 파고들 때, 그때 네 어깨에 손을 얹어 가볍게 밀어낸다.) …….
위림:(입술이 떨어지는 짧은 틈으로 호흡하다보니 그새 숨이 차오른다. 비슷한 속도로 열이 오르고, 마음 안쪽에 차오른 온수도 점점 더 뜨거워진다. 온몸이 애정으로 가득 차 터져버릴 것 같다.)
(터져도 좋아. 데여도 좋고. 그렇게 해서 너랑 내가 서로 사랑했다는 흔적이 남으면, 그것만큼 기쁜 일도 없을 거야. 더 달아오를 것도 없는데 몸이 열기를 원한다. 네 더운 숨을 삼키고, 또 제 숨으로 내뱉다보면…)
…… (습기 가득하고 끈적한 소리를 마지막으로 입술이 떨어진다. 눈앞의 네 입술이 누구의 것일지 모를 타액으로 젖어들어 번들거린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아 얼굴에 미미하게 열이 오른다.) ……진짜 응큼해, 너.
양사비의:…… (응큼하다는 말에 항변하고 싶은 얼굴이 된다. 그 응큼함에 매번 맞춰주고 부채질하는 사람이 누군데 그래. 시선으로 말을 꺼내며, 소매로 번들거리는 네 입술을 닦아준다.)
응큼한…… 여자친구, 싫어?
위림:응큼해서 좋아.
그만큼 나 좋아한다는 거잖아. (입술을 닦아주던 손을 붙잡아 손바닥 안쪽에 입 맞춘다. 진정한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심장이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쿵쿵거리며 요란하게 뛴다.)
양사비의:…… (뭐라고 하려던 말들이 쏙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입술이 묻힌 손바닥이 간지럽다. 누군가가 깃털로 간질이는 기분이다. 손가락만 안으로 움츠린다.)
그건…… 그래. 좋아하니까 이런 것도 다 하고싶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여태 이런 적 한번도 없었으니까.
(목소리가 사그라든다. 기실 일주일 전만 해도 누군가와 이렇게 알콩달콩하고 이상야릇한 상황을 공유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이전의 나랑 달라지는 기분이야. 나한테 이런 벅찬 욕심이 있는 줄도 몰랐고…….
위림:네가 날 욕심냈으면 좋겠어. 같이 있자고, 둘이서만 있자고 해줘. 손 잡자고, 안아달라고 해줘. 쓰다듬고 입 맞춰달라고 해줘.
뭘 바라더라도 다 들어줄게. (이 심장이 널 향해 뛰기 시작했을 때부터 난 네 거인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원한다면 내 전부를 쥐여줄 수 있어. 나는 너만 바라보면서 존재하고 있어. 차마 밖으로 낼 수 없는 말들이 고동소리로 번져나간다.) 원한다고 해줘….
양사비의:……. (다정에 푹 젖은 말들이 쏟아진다. 설탕과 꿀에 절인 과일만큼 달콤하다. 웃음이 피었다. 수줍고 기쁘다. 눈꺼풀이 두어번 삼박이다 잔잔한 호선을 그렸다.)
사랑이 대단하긴 한가봐. (손을 들어 네 뺨을 감싼다.) 내가 아는 위림은 대단한 어리광쟁이에 욕심쟁이었는데. 지금은 나한테 욕심을 내달라고 하고.
(호흡으로 문장을 끝낸다. 찰나의 공백.) ……같이, 있고 싶어. 둘이면 더 좋아. 손도 잡고 싶어. 네가 안아줬으면 좋겠어. 쓰다듬고 입도 맞춰주면 행복할 것 같아.
너를 원해. 네가 나를 원하기를 원해…….
위림:지금도 네가 저렇게 말하는 거 듣고 싶다고 떼쓰는 김에 나 좋아해달라고 어리광부리는 거야. (미미한 온기를 품은 부드러운 손이 닿으면 버릇처럼 웃음이 샌다. 네가 내 뺨을 감싸쥐는 손길이 좋다. 맞닿아서 생기는 포근한 느낌에 중독될 것 같다.)
(손바닥 안쪽에 뺨을 부비적거리며 파고든다.) 네가 바라는 거 다 이루어줄 테니까 매일매일 욕심내줘. 나도 그만큼 어리광부리고 떼도 쓰고 욕심도 낼래.
이러면 이제 바보가 아니고 욕심쟁이라 불러야 하나… (말 끝에 소성이 따라붙는다.)
양사비의:(웃음소리가 샌다. 때를 기다린 봉오리가 꽃잎으로 탁 트이듯 작고 짧은 웃음소리다. 손바닥 안을 가득 채운 네 얼굴이 유해할 정도로 사랑스럽다. 네가 왜 내 거지. 이렇게 잘생기고, 이렇게 완벽한데…….)
(이윽고 양손으로 네 얼굴을 챱 감싸버린다. 그대로 쪽, 쪽, 두어번 뽀뽀한다.) 이제 뭔가 더 하고싶은 건, 없어? 뽀뽀 말고.
위림:(얌전히 양손 가득 붙잡힌다. 입 맞출 때마다 짧은 웃음을 흘린다. 계속 이렇게 붙잡혀있고 싶다.) 이대로 낮잠이나 잘까? 해도 잘 들고, 노곤노곤하고… 행복하고. 낮잠 자기 딱 좋은 것 같은데.
양사비의:……그럴까? 여기 소파에서?
좁진 않으려나. 나는…… 너만 괜찮다면 내 방에서 같이 자도 좋아.
위림:좁으니까 더 붙어있을 수 있잖아. (콧잔등에 입 맞춘다. 가만히 낯을 마주보다가, 예의 짓궂은 표정을 짓는다.) 난 좋은데, 방에 그렇게 남자 막 들여도 돼? (괜히 내뱉는 농담이다.)
양사비의:이상한 짓…… 안한다며. 서로 준비될 때까지. (표정이 미미하게 상기한 채다. 빤히 올려보다 답했다.) 그 말 믿어서.
위림:바보 여자친구. (눈을 마주하다보면 자꾸만 입 맞추고 싶어진다. 드러난 이마에도 입 맞추고 품에 안겨있는 상대를 껴안은 채로 몸을 일으킨다.) 농담이야. 가자.
양사비의:(같이 몸을 일으켜서 자리를 벗어난다. 손은 꼭 잡은 채로, 계단 한 단 한 단을 밟아가며 제 방으로 향한다.)
위림:(맞잡은 손 사이로 파고들어 깍지를 끼고, 걸음을 맞추어 계단을 오른다. 닫혀있는 방 문 앞에 선다.) 손님이 열어도 돼?
양사비의:(고개를 끄덕인다.) 허락도 안 받아도 괜찮아.
위림:남자친구의 특권 같은 거야? (문고리를 당겨 방 문을 연다. 몇 번 봤던 풍경이라지만, 올 때마다 네가 평소에 지내던 곳에 발을 들인다는 느낌에 들뜨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조가 조금 높아진다.) 같이 누울 생각 하니까 설레는 것 같아.
양사비의:남자친구, 소꿉친구. 겸사겸사. (참 익숙한 방인데도 동행자 하나가 옆에 붙었다고 낯선 공간에 다다른 것만 같다. 같이 '낮잠'을 자기로 했을 뿐이지만, '같이' '잠'을 잔다는 행위가 내면의 응큼함을 자꾸만 건드린다.) ……
먼저 가서 누워. 나는…… 적당히 남은 자리에 누울래.
위림:실례합니다.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가,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천천히 침대 위로 몸을 누이면, 네가 잠들기 전과 잠에서 깨었을 때의 풍경이 보인다. 사소한 부분이더라도 네가 보았던 것을 알게되었다는 것 자체로도 기쁘다.)
(멀뚱히 천장만 보던 것도 잠시, 몸을 돌리고 팔을 벌린다.) 적당히 남은 자리는 여기니까 빨리 와서 누워.
양사비의:(소파에서는 내가 아래에 있고, 네가 위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반대가 되어버린다. 네 품에 올라타듯 안겨 익숙하면서도 익숙치 않게 침대 위에 누웠다.)
(눈을 감는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목 안에서 그릉대듯 기분 좋게 앓는 소리가 아주 작게 흐른다.) …….
이렇게 누워있으니까 좋다. 그치.
위림:(품 안 가득 네가 다시 들어차면, 그대로 힘주어 안는다. 가까워진 품에 고개를 묻자 침구에서 묻어나는 은은한 향기와 품에서 나는 네 체향이 온몸을 가득 채운다. 아, 행복해…….)
(저도 모르게 품에 고개를 부비적거린다.) 사방이 다 너인 것 같아서 너무 좋아.
양사비의:(내 양팔 사이에 네가 있다. 숨이 막히지 않게 가볍게 끌어안았다.) 자꾸 심장 뛰는 소리 하면 나 낮잠 못 자.
(손이 네 뒷목을 안마하듯 가볍게 주무르고, 그대로 윗 척추를 타고 내려 등 한복판을 고른 박자로 두드린다.) 그러니까 둘 다 얼른 눈 감고 자자.
위림:이대로면 뜬 눈으로 밤까지 지새도 좋아. (짧고 경박하게 웃곤 기분 좋은 침음을 흘리며 네 품 안쪽에 고개를 기댄다. 일정한 심박소리, 고동하려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듯한 느긋한 손길에 금세 목소리가 나른해진다.) 너 자는 거 보고 싶은데…
양사비의:(검은 머리에 입을 맞추듯 코와 입을 가볍게 묻었다. 아, 한가득 네 체향이 들어오니 정말 사방이 다 너로만 이루어진 것 같다.)
나는 너 자면 잘 거야. 대신에 내가 너보다 딱 5분 늦게 일어날게. 그때 자는 얼굴 구경해.
위림:너무하네…. 알았어, 꼭 지켜야 돼. (입 맞추고 싶다. 지금의 아늑한 자세와 짧은 입맞춤 중에 갈등하다가, 결국 눈을 내리감는다. 5분 늦게 일어난다고 했으니까 자는 얼굴 실컷 구경하다가 뽀뽀로 깨워줘야지. 일어날 때까지 입 맞출 테다.) 잘 테니까 너도 빨리 자.
양사비의:응. 알았어. 약속 지킬게. (림은 은근히 잠이 많으니까, 림보다 자신이 일찍 깰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계속 자는 척을 해야겠다며 속내로 생각한다.)
잘 자, 좋아해.
위림:(좋아해, 라고 말하려다가 입술을 옴죽거린다.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사랑해, 나도. (네가 잠드는 침대에서 너와 함께 잠들 수 있는 건 도대체 얼마나 큰 행운인 걸까. 차라리 이대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복한 기억만 가득하게….)
(머리카락을 스치는 얕은 숨결과 심박소리를 자장가 삼는다. 곧 수마에 빠져든다.)
양사비의:(곁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점점 느려진다. 졸음 속으로 빠져드는 사람의 호흡이다.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보면, 상대의 사랑스러운 나른함이 이쪽까지 젖게 만드는 듯 했다. 눈을 떠서 네 자는 얼굴을 보고 싶은데, 알아차릴 새도 없이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 (눈을 뜨면, 네가, 그리고 내가, 그리고 저무는 하루가……. 생각이 채 맺어지지 못하고 잠든다.)
좋아하는 사람의 숨결, 온기, 체향으로 가득한 침대입니다.
몰려오는 졸음을 이길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꿈 없는 잠에 빠집니다.
... ...
눈을 붙인지 얼마나 됐을까요?
피부에 짧게, 그리고 자주 맞닿는 감촉이 조금씩 졸음을 걷어냅니다.
양사비의:……. (눈썹을 움찔거린다. 잠에 휘감겨서 감각이 둔하다. 일단은 앓는 소리만 내고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위림:(벌써 다섯 번째인데, 이걸로는 모자라나…. 눈썹이 꿈질거리는 걸 보니 얕게 깬 것 같긴 한데. 아직 잠에 취한 얼굴을 가만 바라보다가, 양 뺨에 두어 번씩 짧게 입 맞춘다. 일어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양사비의:리, …… (움찔거리다 보니 서서히 정신이 맞붙는다.) 림……?
(딱붙은 눈꺼풀을 천천히 연다. 흐릿한 인영이 보인다.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상대의 머리를 자신의 안에 가두려고 했다.) 림…….
위림:아, …… (잠결에도 날 찾고 부르는 목소리와 손길은 이겨낼 방법이 없다. 속절없이 상대의 고개 아래로 껴안긴다. 아무 욕심도 없는 네가 나를 원하는 게 좋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오로지 너라서.)
(얌전히 품에 안겨있다가, 목덜미부터 턱까지 잘게 입 맞춘다.) 잠꾸러기 여자친구, 일어나세요.
양사비의:으, 응……. (시야가 뚜렷해지길 기다리며 눈을 마구 깜박거린다. 아. 이제야 앞이 보인다. 감각도 점점 선명해져 네가 여태 내게 입맞췄음을 깨달았다.) 간지러워…….
(그러면서도 상대를 밀쳐내지 않는다. 느른한 잠이 주는 여운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뿐이다.) 너랑, 같이 자서…… 더 많이 잤나봐.
사실 내가 먼저 일어날 줄 알았는데. ...
위림:(아직 잠이 덜 깬 얼굴도, 가라앉은 목소리마저도 사랑스럽다. 이런 풍경이 매일 반복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전히 상대의 시야보다 조금 아래에 위치한 채 올려다본다.) 푹 잤으면 됐지, 뭐. 너 깨우느라 고생한 입술한테 상으로 뽀뽀해줄 생각은?
양사비의:(고개를 숙여서, 쪽.)
상은 한 번이면 돼?
위림:(고개를 젓는다. 시선의 의미는 명확하다.)
양사비의:(쪽.)
(다시 쪽.)
(연달아 입맞춤을 한 뒤 제 입술이 닿은 네 뺨을 문질러준다.)
나머지 상은 할부로 해줄게. 일시불로 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 ...
위림:(눈을 잠시 내리감고 문질러주는 손길을 느낀다.) 할부는 평생이지?
양사비의:(고개를 끄덕인다.)
위림:(도장찍듯 입술에 입 맞춘다.) 좋아, 결제 완료.
그나저나, 이러고 있으니까 따끈하고 좋네…. 둘 다 일어난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다시 품 안으로 파고든다.)
양사비의:(작게 웃었다.) 지금 몇 시야? 바깥에 보니까 조금 깜깜해진 것 같은데…….
위림:(주머니를 뒤져 스마트폰을 꺼낸다.) 7시 반 조금 넘었네. 꽤 오래 잤다, 우리.
그 말에 창밖을 보니 어느덧 그림자로 천천히 물들고 있습니다.
단둘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지나갔습니다.
이래저래 조금 애매한 시간대구나, 생각이 드는 찰나…
위림이 애교스럽게 말해옵니다.
위림:그냥 이참에 오늘 자고가면 안 돼?
장롱 안에 토퍼 남는 거 있잖아. 밤에도 같이 자는 거 좀 그러면 그거 깔고 바닥에서 자도 되니까… 응?
불건전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나 봅니다.
비의, 지능 판정!
양사비의: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런데, 위림에게 장롱 안에 토퍼가 있다는 얘기를 했던가요?
양사비의:……
장롱, 안에…… 토퍼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적당히 넘겨짚은건가. 상대를 빤히 쳐다본다.)
위림:네가 전에 그랬잖아, 아저씨가 토퍼 새 거 선물로 받아왔는데 원래 쓰던 것도 멀쩡해서 나중에 바꾸려고 장롱 안에 넣어놨다고. 기억 안 나? (마주 빤히 쳐다본다. 눈동자엔 한점 거짓도 없다.)
양사비의:(...내가 그런 소리를 했나?)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57
판정결과: 보통 성공
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영 긴가민가합니다.
하지만 위림의 낯이 순진한 걸 보니 위림에게 말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양사비의:(아, 그랬던 적이 있었구나. 곰곰이 과거의 일을 되짚어 보니 상대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확신히 서서히 든다.)
자고가는 건 상관이 없는데……
삼촌한테 너 우리집에서 자도 되냐고 허락은 받아야 할 것 같아. 내가 물어볼게.
위림:알았어. 허튼 짓 안 하는 믿을만한 소꿉친구라고 꼭 전해줘. (싱글벙글 웃는다.)
양사비의:……막 사귄 남자친구라고 하면 역시 안된다고 하시겠지?
(……적당한 선에서 거짓말을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 휴대폰을 찾아서 삼촌에게 전화를 건다.)
(머잖아 전화가 연결되면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너무 평범해서 어떠한 거리낄 것도 없다는 식의─ 말을 건다.) 응. 삼촌.
다른 게 아니라, 친구 우리집에서 자고 가도 돼? 삼촌도 아는 애야. 위림이 있잖아. 걔가 같이 놀자고 게임기 가져와서…….
나는 내 방에서 자고 걔는 소파에서 잔대. (태연하게 거짓말을 마치고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서 가볍게 깨문다. 잔뜩 긴장을 품은 채로 상대의 대답을 기다린다.)
설득
기준치: 50/25/10
굴림: 7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양사비의:…….
된다고?
알았어. 응. 응.
장롱에 토퍼 있는 거 그거 쓸게. 오늘 저녁이랑 내일 아침도 내가 제대로 챙겨서 내일 보낼게.
응. 끊어. (이윽고 전화가 끊긴다…….)
위림:(통화가 이어지는 동안 표정이 미미하게 계속 변했다. 의외로 거짓말이 능숙해서 놀랐다가,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마주 긴장했다가, 허락이 떨어져서 안심했다가…. 그 짧은 통화 새에 널뛰기라도 한탕 한 것 같다.)
오늘은 저녁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내일 아침에도 같이 일어나고… 꼭 신혼부부같다. (들뜬 표정이다.)
양사비의:(전화가 끊어지고 나서 긴장도 끊어진다. 숨을 길고 깊게 토하고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신혼부부라니, 거짓말 해야 같이 잘 수 있는 신혼부부가 어디 있어.
우리 집에서 자는데 잠옷은 어떡하지. 삼촌 옷이라도 빌려 입을래? 조금 후줄근할 수 있긴 한데…….
위림:그러니까 앞으로는 거짓말 안 해도 같이 잘 수 있게 해야지. (내키는 대로 내뱉고는 제 옷차림을 한 번 본다. 음, 어림도 없군…) 그 정도야 괜찮아. 아무거나 줘.
양사비의:저녁은 어떡하지……. 뭐라도 배달시킬까? (그런 소리를 하면서 먼저 침대 바깥으로 나선다. 옆에 있는 삼촌 방에 들어가서 하얀 티셔츠 한 장과 트레이닝 바지 하나를 꺼낼 생각이다.)
위림:배고파? 난 안 먹어도 될 것 같긴 한데….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는다. 돌아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셈이다.)
양사비의:흠……. (이쪽은 조금 출출한 것 같다. 방문을 벗어나다 고개만 슬쩍 돌려 물어본다.) 그러면 라면 하나 끓여서 같이 나눠 먹을래?
위림:좋지! 계란도 넣자. 물 미리 올려둘게. (방을 나서는 길에 그대로 상대를 품에 가볍게 안았다가 놓는다. 뺨에 입 맞추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곧 계단 아래로 내려간다.)
양사비의:…….
웬일이래……. (계단 밑으로 사라진 상대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라면, 끓일 줄 아나? 다 태워먹는 거 아니야? 아니면 물 조절도 못한다든가…… 아니, 이건 상대를 너무 낮잡아 보는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홀로 곱씹으며 삼촌의 방에 들어간다.)
(내부에서 옷장 서랍을 열어 적당히 깨끗하고 사이즈가 넉넉한 옷가지를 찾아내고, 밑으로 빠르게 내려간다. 물 올리는 상대방을 의심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닐 수가 없고, 솔직히 조금 걱정됐다.)
위림:(비의가 잠옷을 챙기러 간 새에… 물이 가득한 냄비를 앞에 두고 고민에 빠진다.) …이렇겐가? 이 정도면 되나? 적은가? (냄비에 담긴 물을 유심히 본다. 몇 번을 덜고 붓기를 반복하다가, 어쩐지 1인분치고는 다소 많은 물을 담은 채 가스레인지에 올린다. 어쨌든 '냄비에 물을 담아 올렸다'는 사실로 제법 뿌듯하다.) 흠, 쉽네!
양사비의:(옷가지들을 소파 위에 얹어두고 후다닥 네 옆으로 바로 선다. 냄비 안쪽 넘치게 찰랑거리는 물 양을 보고 기겁하는 것도 잠시, ─국이라도 끓이나?─ 아직 스프나 면, 둘 중 어느 것도 투하되지 않았음에 감사한다.)
물 양이 많아. 이렇게 라면 끓이면 밍밍할 거야. (가스불을 끄고 냄비 손잡이를 잡아 물을 좀 덜어낸다.)
위림:(이런 것도 할 줄 아는 남자친구는 처음이라고 하면서 칭찬해주겠지? 나, 요리 못하는 줄 알았는데 재능 있을지도…. 물 양을 보고 기겁한 건 보지도 못하고 보람에 찬 채 기세등등하게 서 있다가… 물 양이 많다는 소리에 엥,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진짜?
양사비의:……그런데, 뭐.
라면 처음 끓여보는 거 아니야?
처음 끓였는데 물 조절 이 정도 하면 잘한거지.
(그런 말을 하며 냄비를 다시 조리대 위에 얹는다. 불을 올린 뒤 머잖아 보글보글 기포가 끓으면, 스프와 면을 냄비 안에 넣었다.)
위림:(라면 물도 못 맞추는 남자친구는 싫다고 그러면 어떡하지… 그 짧은 찰나에 쓸데없는 고민을 수도 없이 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양 방긋 웃는다.) 그치? 내가 계량컵도 아니구, 처음 하는 건데 어떻게 딱 맞춰. 이 정도면 선방한 거지! 맞지? (뒤에서 껴안으며 능청스럽게 재잘거린다.)
양사비의:응, 응. 그럼. (면이 거진 다 익으면 날계란 하나를 톡 까서 라면 국물 안으로 떨어뜨린다.)
(엷게 웃는다.) 내 남자친구가 최고야.
위림:(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열기와 함께 올라온다.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로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이런 남자친구 또 없다니까.
양사비의:(아, 귀여워. 상대가 이리 귀여우니 시선에서 달콤함이 뚝뚝 떨어진다.) 림, 젓가락 좀 식탁 위에 올려주라.
라면 다 끓은 것 같아.
위림:응. (이젠 버릇처럼 뺨에 입 맞춘다. 껴안았던 손을 풀고 젓가락과 그릇을 챙겨 각자 자리에 알맞게 둔다. 비의가 앉을 의자의 맞은편에 앉는다.) 라면 오랜만에 먹는다. 맛있을 것 같아.
양사비의:(냄비를 식탁 한가운데 올리고, 물도 한 잔씩 따라놓고, 앞접시도 꺼낸다. 먹을 채비를 끝내면 네가 먼저 한 젓가락을 떠가길 기다렸다.) 먼저 먹어. 내가 맛있게 끓였어.
계란 안 풀었으니까 계란 먹고싶으면 가져가도 돼.
위림:나 그렇게 식탐 많은 사람 아닌 거 알면서. 그리고 반씩 먹기로 했는데 내가 다 가져가면 어떡해? (냉큼 계란을 반으로 갈라 비의의 그릇에 덜어준다. 그 김에 면도 좀 덜어주고, 국물도 떠서 부어준다. 꽤 괜찮은 남자친구처럼 보이려나, 나. 그럼 또 칭찬해주지 않을까? 생글거리는 낯 새로 언뜻 기대감이 비친다.)
양사비의:……
(시선을 내렸다. 웃음이 너무 환히 번져서 그대로 보여주기가 부끄러운 까닭이다.)
고마워. 잘 먹을게.
내 남자친구는 정말…… 배려심이 좋아.
위림:흐흥. 그럼! 누구 남자친구인데. 또 얘기해줘, 내 남자친구가 최고라고. (빤히 쳐다본다.)
양사비의:내 남자친구는, 정말……
정말, 이 세상에서 최고야.
위림:(라면, 먹어야 되는데…… 자꾸만 웃음이 새서 젓가락만 만지작거리고 먹진 못한다. 이대로는 라면이고 뭐고 좋아한다는 얘기만 하게 될 것 같아서 화제를 돌린다.) 최고의 남자친구가 덜어준 라면이니까 빨리 먹어. 더 불으면 진짜 우동같아지겠어.
양사비의:(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로 너를 바라보다가, 젓가락을 들어 덜어진 면을 후루룩 먹는다.) 맛있다.
너랑 같이 먹어서 더 맛있는 것 같아.
위림:(비의가 젓가락을 드는 걸 보고 나서야 자신도 라면을 한 입 먹는다.) 난 네가 해준 거라 더 맛있는 거 같은데.
양사비의:(바람 빠지는 웃음을 짓는다. 한 젓가락을 더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다리를 바깥쪽으로 뻗으려다 우연히 툭, 네 발에 제 발끝이 닿아버렸다.)
아, ……미안.
위림:(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건가? 한 입 우물거리고 있는 모습만 봐도 흡족해서 먹는 것도 잊고 계속 바라만 보게 된다. 온 신경이 비의에게로 쏠려있다가, 발끝이 닿자 순식간에 흐트러진다.)
……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마주 툭, 친다.)
양사비의:…… (잠깐 머뭇거린다.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올 생각도 못하고 잠깐 망설이다가, 네 발등 위를 제 발로 가볍게 덮어버렸다.)
위림:(네 발에 눌리는 느낌도 좋을 건 또 뭐람. 반대쪽 발로 비의의 다른쪽 발등을 톡 친다.)
양사비의:빠, 빨리 라면이나 마저 먹어. 불겠다.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맞닿은 발을 거둘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괜히 핀잔을 주듯 한 마디 툭 던진다.)
위림:(샐샐 웃는다.) 알았어. (그대로 비의의 다른쪽 발등을 제 발로 덮어버리고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양 능청스럽게 라면을 먹는다.)
양사비의:(고작 발끼리 겹쳐있는 게 뭐라고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면 잘못을 저지른다기보다는…… 묘하게 어떠한 선에 가까워진다는 기분을 느꼈다. 이 선을 넘을 생각은 쟤도 나도 '아직은' 없지만.)
위림:(손도 아니고 발인데, 어쩐지 손 잡은 것보다 더 두근거리는 것 같다. 다리를 타고 간질간질한 느낌이 타고 올라온다. 그냥 간지러운 건지, 이런 거에도 설레는 건지, 아니면……)
(더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 생각을 그친다. 그새 반쯤 불어버린 라면을 먹다가, 괜시리 입이 마르는 기분이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정적을 깬다.) 근데, 내 바보 여자친구는 라면도 잘 끓이네. 여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는 것 같아.
양사비의:(말없이 라면을 먹는데 집중했다. 후루룩, 후루룩. 작은 소음이 몇 번 오가는 도중 네 말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앞으로도, 많이 끓여줄게. (고작 라면이 뭐야. 네가 맛있게 먹어주기만 한다면, 볶음밥이든 파스타든 아니면 그 보다 몇배는 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든 전부 해줄 의향이 있다.) 봄방학만 별 일 없이 넘어가면.
위림:나, 네가 해주는 거면 매일 라면만 먹어도 행복할 것 같아. 제일 좋아하는 음식도 바뀔 거 같고. (시시덕거린다.)
다른 것도 할 줄 알아? 그럼 나 너랑 뭐 먹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둘래.
양사비의:삼촌은 요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니까. 보통 끼니를 같이 먹게 되면 내가 차려. (그러니까 네 생각보다 할 줄 아는 요리의 가짓수가 많다는 소리였다.)
……너무 어려운 것만 아니면 웬만한 건 다 해줄 수 있을걸? 값비싼 소스를 뿌린 고급 스테이크라든가, 아니면 몇 시간을 넘게 푹 고아야 끓일 수 있는 스튜라든가. 그런 것만 아니면 뭐든.
위림:아저씨, 그러실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뭐, 나야 잘 됐지. 네가 해준 요리도 잔뜩 먹을 수 있게 됐으니까. 그럼 파스타나 오므라이스도 할 줄 알아? (잔뜩 기대하는 눈빛이다.)
양사비의:오므라이스, 해줄까? (저 기대하는 눈빛을 볼 때마다 귀엽다는 생각이 삽시간에 번져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케첩으로 그림도 그려줄게.
위림:응. 내일 아침으로 먹을래. 위에 곰돌이 그림 그려줘. (삽시간에 기분이 들뜬다. 저도 모르게 내일의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느지막히 자고 일어나서 또다시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함께 식사하는….)
(생각보다 괜찮구나, 내일을 생각한다는 건.) 기대된다.
양사비의:(빠르게 머릿속으로 냉장고에 남은 재료들을 파악한다. 계란, 있고. 양파, 있고. 버섯, 있고. 케첩, 있고. 오므라이스를 할 때 부족한 재료는 딱히 없는 것 같다. 어느새 다 비어버린 라면 냄비를 눈앞에 두고 빈 그릇 따위를 쌓아 치우기 시작한다.) 다 먹었으면 수저 이리 줘.
나 설거지 하는 동안 너 이 닦고 오면 되겠다.
위림:(그릇에 수저를 포개 앞으로 내민다. 소파 위에 올려진 옷가지들을 흘끔 본다.) 그김에 잠옷도 갈아입고. 새 칫솔 있어?
양사비의:잠옷은 소파 위에 있는 거 입으면 되고…… 새 칫솔은 화장실 들어가면 거울 수납장 뒤에 새 거 있을 거야. 그거 쓰면 돼. (냄비 안으로 그릇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씻고 와. 너 다 씻으면 나도 씻어야지. (손을 뻗어 네 뺨을 쓰다듬듯이 가볍게 꼬집었다.)
위림:알았어. (손이 닿기만 하면 웃음이 난다. 네 손이 떨어지기 전에 손목을 잡아 손바닥 안쪽에 입 맞추고 일어선다. 소파 위에 있는 옷을 챙기고, 설거지 준비를 하는 네 뒤로 가 가볍게 한 번 껴안는다.)
얼른 씻고 올게. (잠시 떨어지는 것도 아쉬워 괜시리 등 뒤에 고개를 부비적거린다. 흰 머리카락 위에 입 맞추고 2층으로 올라간다.)
양사비의:(고무장갑을 끼는 와중에 뒤로부터 와닿는 감촉과 무게가 느껴진다. 누구인지 돌아보지 않아도 안다. 내게 이렇게 매달리며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은 이 세계에 단 한 명밖에 없다.)
천천히 씻고 와도 돼. 이도 어금니 안쪽까지 꼼꼼하게 닦구. (나이 적은 동생을 어르듯 말했다.)
위림:내가 여덟살 애도 아니구. (계단을 오르려다가 팩, 비의를 보고 입술을 비쭉거린다. 그러다가도 금세 샐샐 웃으며 마저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한다. 네가 해주는 거면 사소한 것마저도 소중하고 기쁘다. 그만큼 나를 세심히 봐주는 것 같아서.)
(곧장 화장실로 가 세수하고, 비의가 알려준 대로 거울 수납장 뒤쪽에서 새 칫솔을 꺼내 양치한다. 어금니 안쪽까지 꼼꼼하게 닦았으니까 칭찬해달라고 해야지─시덥잖은 생각이나 하면서.)
(빌려준 옷으로 환복하고, 묶었던 머리도 풀어헤친다.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가만 바라본다.) 이런 옷도 나쁘지 않네, 널널해 보이고… (괜히 앞머리를 이리저리 매만지다가도, 외려 더 이질적이게 보여서 대충 털어 흐트러트린다.) 흠, 이렇게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가…… (이리저리 살펴본 뒤에야 화장실 밖으로 나선다.)
(설거지는 끝났나? 계단 아래로 내려가 1층을 기웃댄다.)
양사비의:(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한다. 냄비 하나에, 수저 두 쌍에, 물 컵 두 개. 앞접시 두 개. 많지도 않은 양이므로 금방 끝낸다. 물기 턴 그릇을 건조대 위에 올려두고 네가 사라졌던 계단 쪽으로 몸을 슬쩍 기울여 살펴본다. 안 내려오나? 조금 오래 걸리는 건가?)
(기웃대며 너머를 흘금 쳐다보고, 네가 내려오기까지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있기로 한다. 머잖아 단을 하나하나 밟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편한 차림, 풀어헤친 머리. 늘상 보는 교복과는 또 다른 차림의 네가 눈앞에 있으니 괜히 침을 한 번 삼키고야 만다.)
다…… 씻었어? 다 씻었으면 나 씻고 올게?
위림:설거지 벌써 다 했어? 빨리 하고 내려와서 네 뒤에 붙어있으려고 그랬는데…. (영 아쉬운 눈빛이다.) 응, 다 씻었어. 추현 아저씨 옷 편하고 좋네. 나중에 오시면 감사하다고 전해줘. (가벼운 걸음으로 가 옆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한다.)
빨리 씻고 와. 너랑 붙어있게.
양사비의:(이번에도 또 양손으로 네 양뺨을 주물주물해준다. 왜 자꾸 나는 너를 이렇게 어린애 취급하게 될까.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서야 가슴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사랑스러움을 표현할 길이 없다.)
알았어. 금방 씻고 올게. (손을 거두고는 계단을 밟아 위로 올라간다. 단을 하나하나 밟아가는 모양새가 제법 서두르는 사람의 형태였다.)
위림:(2층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시선을 뗀다. 기다리는 시간은 너를 되새기는 시간이다. 뺨을 감싸고 문질러줬던 손길을, 발등끼리 맞닿았던 감촉을, 우리가 함께했던 그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온통 잊지 않고 싶은 순간뿐이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행복했던 적도 없다. 영원이란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모든 게 영원하길 바라게 된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어떨까. 너도 나도 평생 행복할 수 있을 텐데, 현실은 왜 맨날 생각처럼 되지 않는지.)
(왜 매번 내 편은 한 번도 들어주지 않는 건지……)
(괜시리 네가 앉았던 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진다. 홀로 있는 시간만 되면 끝이 없는 늪이 발 아래에 놓인 것 같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혼자가 되는 걸 견딜 수 없어진다. 보고 싶어, 같이 있고 싶어. 네가 내려올 계단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양사비의:(평소처럼 ─사실 평소보다는 조금 더 속도를 냈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화장실 옆에 있는 제 방으로 들어가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상의는 목이 조금 늘어진 후줄근한 하얀 티셔츠, 하의는 중학교 때 체육복으로 입던 검은색 트레이닝 반바지다. 이 차림은 조금 그런가…… 싶지만, 네 앞이라고 갑자기 예쁘장한 잠옷을 찾아 입기도 어려운 일이다.)
(머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작은 고무줄을 집어 꽁지머리를 만들었다. 나름 깔끔하게 보이고 싶어서 선택한 전략이다. ─전략이라기에는 너무 허술하다─ 그대로 바깥으로 내려가려다가, 계단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널 찾아본다.) 림?
뭐하고 있었어? (뒤늦게 몸 전부를 내밀어 네가 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쟤는 저기에 가만히 앉아서 무얼하고 있는지.) 티비를 보는 것도 아니고, 여기에 가만히 앉아서……,
위림:(이대로 안 오면 어떡하지, 그럴 일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한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네게 마음을 너무 많이 준 모양이다. 너무 많이 좋아하고, 너무 많이 소중하게 여겨서 이 잠깐도 참을 수 없나봐.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방법 같은 건 모르니, 네가 여태 지었던 표정들만 몇 번이고 곱씹을 뿐이다.)
(축 늘어진 인형마냥 소파에 기대있다가, 목소리가 들리면 바로 몸을 똑바로 한다. 드리웠던 그림자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웃는다.) 뭐하긴, 너 내려오는 거 기다렸지. 혼자 있으려니까 심심하더라. TV도 볼 게 없고, 창 밖 구경도 시시하고……. (부러 거짓을 보탠다.)
양사비의:그러면 그냥 윗층으로 올라와서 기다려도 됐을텐데. 샤워나 목욕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닦는 거 옆에서 지켜보고……. (그런 말을 하며 네 옆으로 다가간다. 꼭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모양새였다.)
이리 와. 잘 기다렸으니까 내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조금 멋쩍다.) 안아줄게.
위림:그럴 걸 그랬나……. (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곧장 네게 기대 품 안으로 파고든다. 아, 역시 이 품이 제일 아늑하고 포근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온통 네 체향으로 가득 찬다. 불안이 들어설 자리따위는 없어진다.)
(그대로 고개를 파묻는다.) 이러고 있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
양사비의:(사귀는 사이가 되고 나니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너는 생각보다 애교가 많다. 어리광도 심하고. 데면데면할 적 보였던 시큰둥함이나 냉정함은 허세나 수줍음이 섞인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 때에는 내게 이만큼의 진솔함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양팔 가득 품에 너를 끌어안고 가볍게 도닥인다.) 우리 그냥, 이러고 자버릴까? 서로 꼭 끌어안은 채로.
위림:(잘은 웃음소리가 샌다.) 그럼 좋지, 난. 이러고 있으니까 심장 소리도 잘 들리고, 너랑 가깝고, 따뜻하고…… 행복해. 잠도 잘 올 것 같아. (그렇게 하나 둘 내뱉다보면, 네가 주는 모든 것들이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아무것도 없던 세상에 봄바람이 불고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다. 무채색의 세상에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너랑 함께라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게 화사해진다.)
(내 삶의 모든 걸 쥐여주고 싶다. 그런 충동을 느낀다.) 네가 하는 거면 다 좋아.
양사비의:림, 위림. (나직하게 불렀다.)
내 방으로 올라가자. 가서 끌어안고 자자. (속닥거린다.)
위림:(그 말에 고개를 들어 바라본다.) 정말?
양사비의:응. 정말.
거실 소파에서 자기에는 제대로 잔 느낌도 없을 것 같아서.
위림:사귄지 이틀 된 남자친구인데, 그래도 되는 거야? (농조로 말해도 접힌 눈매에서 기쁜 기색이 묻어난다.)
양사비의:낮잠 같이 자면서 확인해 봤으니까 괜찮아.
내 남자친구…… 믿음직해.
위림:하하! 그런 말 해준 거, 네가 처음이야. (어깨에 푹 기대버린다.)
올라가자, 이제. 누워서 마저 할래.
양사비의:(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손을 가볍게 잡아끌며 계단 윗쪽으로 향했다.) 믿음직하다는 말이, 내가 처음이야?
위림:(당기는 힘을 따라가며 걷는다.) 응. 다들 내 말 잘 안 믿어주잖아. 농담인지 진심인지 헷갈린다고 그러고….
그동안 거짓말을 많이 한 것도 맞긴 해. (어깨를 으쓱인다.) 그래도 너한텐 거짓말 하나도 안 했어.
양사비의:그래도 너 좋아하는 애들 많잖아. 심심하다 싶으면 여자애들한테 고백도 받는 애가…….
위림:고백했다고 해서 정말 날 좋아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 걔네는.
양사비의:그건…… 그렇지.
그러게, 걔네들은 네 단편적인 부분이 전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생각은 자연히 '제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네 말로 이어진다. 너에 관해 남들보다 많이 아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괜히 기분이 좋다.)
(계단을 밟아 올라가 어느새 제 방까지 다다른다. 문을 열고 함께 안으로 들어선다.)
위림:난 네가 왜 인기가 없는지 그게 더 이해 안 되는데. 바보같을 정도로 착하고, 차갑게 생겼어도 그만큼 다정하고… 가끔 고장나는 것도 귀여운데. (익숙하게 방 안으로 걸음한다.)
(침대 앞에 선다.) 아, 이건 나만 아는 모습인가?
양사비의:…….
(부끄럽다.)
(아주 부끄럽다.)
(어깨를 한 대 치는 대신에, 침대에 넘어지도록 너를 밀었다.)
(그리고 곧장 저 역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서 대답했다.) 응.
위림:으왓. (그대로 침대에 고꾸라진다. 몸을 돌리며 소리 내어 웃는다.) 하하, 하하하…… 아, 너무 좋아. (말에 웃음이 섞인다.)
(걸터앉은 몸의 허리를 껴안는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지금같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나만 알게.
양사비의:(허리에 휘감기는 무게 때문에 침대 위로 같이 넘어질 뻔 했다. 손으로 무게를 지탱하며 너를 내려다본다.)
……. (웃는 얼굴을 기억 속에 현상한다. 검은 필름에 투명하게 상이 새겨지듯 네 웃음을 머릿 속에 담고난 뒤에야 몸에 힘을 풀고 네 몸 위로 엎어졌다.)
앞으로도 너만 알아.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일게.
위림:(제 몸을 내리누르는 무게마저도 기쁘기만 하다. 그대로 품 안 가득 껴안는다.) 보이면 안 돼. 우리는 서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드러난 이마에 입 맞춘다.) 그치?
양사비의:……. (저당잡혔네, 아주 저당잡혔다. 현재고 미래고 네가 전부 움켜쥐고 있다는 선언을 들었는데도, 기분이 하나도 나쁘지 않다.)
(눈을 내리감는다. 뱉어내는 호흡이 편안하니 느긋했다.)
응. 알았어. (이마에 입술의 감촉이 느껴지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내가 많이 좋아해.
위림:(네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온수 속에 잠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 한켠이 벅찰 만큼 따뜻하고 포근해져서…) 좋아한다고 더 말해줘. 더 듣고 싶어.
양사비의:좋아해.
림, 위림을 좋아해.
정말… 많이 좋아해.
(눈을 슬그머니 떠서 너와 마주본다.) 바보가 되어도 괜찮을 정도로 좋아….
위림:아, 진짜…… (너무 행복하면 얼굴이 달아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널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좋아한다는 말이 이어질수록 뺨이 상기된다.)
(너무 행복해서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지? 웃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마주보다가, 힘을 줘 강하게 껴안는다.)
너 때문에 나까지 바보 될 것 같아…
양사비의:(이쪽도 두근거림에 뇌가 붉게 익어버린지라, 멍한 시선으로 널 쳐다보기만 했다.)
……뽀뽀. 뽀뽀해주면 안 돼?
위림:(네 말에 언령이라도 깃들어있는 건지, 부탁할 때마다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다. 하물며 이런 부탁은 더.)
(쪽, 소리나게 입술에 입 맞춘다.)
(한 번은 아쉬우니까, 한 번 더.)
양사비의:…… 굿나잇 키스 받았으니까, 이제 자야겠다.
(네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한 팔로는 네 허리를 감아안고,제 자리를 잡아 잘 준비를 한다.)
남자친구 뽀뽀 받았으니까 이제 다 만족했어.
위림:나는?
나 아직 여자친구 뽀뽀 못 받았는데.
양사비의:(후다닥 뺨에 뽀뽀한다.)
입술에도 해?
위림:(끄덕인다.)
양사비의:(입술에는 느릿하게 뽀뽀했다.)
잘 자.
위림:좋아, 나도 이제 다 만족했어. (제게 기댄 머리카락 틈에 고개를 묻고, 양 팔로 품에 안는다.)
잘 자. 사랑해.
좋은 꿈 꿔.
언제나 홀로 잠을 청하던 침대였는데, 오늘은 한 사람이 아닌 둘이 되었습니다.
멋대로 남의 집을 차지하고, 뻔뻔스럽게 굴고,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했는데…
완전히 미워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좋기만 한 걸 보면 어쩌면 지금이 꿈인 건 아닐까요······.
자, 이제 잠을 청하도록 합시다.
온종일 위림이랑 같이 있으면서 처음 겪는 일이 많았으니, 금방 잠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눈을 내리감고, 서서히 잠에 빠져듭니다.
... ...
또다시, 꺼멓기만 한 시야 틈에 서서히 빛이 스며듭니다.
듣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장면이 들이닥칩니다.
익숙한 곳입니다. 옥상의 풍경이 보입니다.
햇빛은 유독 따갑고, 하늘은 시퍼런 색입니다. 여름이군요.
운동장에서는 축구를 하는 남학생들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그 소음을 가르고, 한 사람은 크게 언성을 내고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을 향해서 분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주인공을 향해서요.
비의, 관찰 판정!
양사비의: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9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소리치는 건 위림입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얼굴로 실성한 듯 구는 모습이라니, 이런 모습은 상상해본 적도 없습니다.
지난밤의 꿈에 이어서 보이는 것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두 손으로 주인공의 옷깃을 틀어쥐고서 외치고 있습니다.
위림:이제 와서 다시 날 찾겠다고. 네가 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그따위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내게 이러지는 말았어야지!
선연한 분노. 하지만 슬퍼 보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 1D15 상승합니다!
양사비의:9
주인공은 멱살을 붙잡힌 채 그저 바라보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한 시선입니다.
노골적인 태도를 읽어낸 건 당신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위림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멱살을 틀어쥔 손을 내던지듯 풀어버립니다.
주인공은 벽면에 등을 부딪히고, 위림은 천천히 뒤로 물러섭니다.
한 발짝, 두 발짝…
그리고 세 발짝.
난간 위로 올라선 몸이 위태롭습니다.
뒤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 끝이 일렁입니다.
위림:기억해, 네가 몇 번이고 말해도 나는 이럴 거야.
불길한 예감이 치밀어오릅니다.
몸이 뒤로 기울어지고, 균형이 무너지며 스스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순간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양사비의:(입을 뻐끔거린다. 내가 기억하는 내 목소리가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림, 림?
림, 그러지마. (놓지 말라는 것인지,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인지, 네가 나쁜 짓을 저질렀단 사실을 상기시키지 말라는 것인지. 모호한 말만 입엣말로 중얼거렸다. 그 뒤로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옥상 밑에서는 비명이 울립니다.
'사람이 떨어졌어! 누가 119에 전화 좀 해!'
축구를 하던 학생들의 목소리도 잦아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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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잖아요. 늦었을 겁니다.
마치 옥상에서 주인공이 떨어졌을 때처럼….
당신의 친구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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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지금 내려다보더라도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비의, SANc 1/1D2 및 ◼◼◼ 1D15 상승합니다!
양사비의:
SAN Roll
기준치: 80/40/16
굴림: 3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1
2
이성 1 감소 및 ◼◼◼ 2 상승합니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주인공은 몸을 일으키고 옷에 묻어있는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서는 중얼거립니다.
자주 가는 카페가 오늘은 열지 않았다던가, 사려고 했던 책이 이미 팔렸다든가. 그런 아쉬움을 말하는 듯한 가벼운 어조로.
주인공: 히든 엔딩의 루트가 막혀서 저러나?
먼저 더 공략할 걸 그랬네.
이건 분명 악몽일 것입니다. 아주 터무니없이 끔찍한 악몽이요······.
비의, 이성 판정 1/1D2!
양사비의:
SAN Roll
기준치: 79/39/15
굴림: 1
판정결과: 대성공
금방이라도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습니다.
어떻게든 이 몽상을 회피하고 싶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죽음을 죽음이라 여기지 않는 태도는 꿈이라고 해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거부감에 반사적으로 눈을 뜨면,
옅은 어둠입니다.
누군가 당신의 곁에서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어줍니다.
눈꺼풀 위를 덮어내자 미온한 체온이 느껴집니다.
살아있기에 느껴지는 온도입니다.
위림:악몽 꾸는 것 같더라, 비의야.
조금 더 자.
이제는 좋은 꿈 꿀 수 있을 거니까…
다정하게 속삭여옵니다.
이제는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럴 것만 같아요.
Chapter 4. 봄 소나기가 내리는 밤이야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어두컴컴합니다.
낮이라면 형광등을 켜지 않았다고 해서 이만큼 어둡지는 않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새카만 창밖에서는 비가 내립니다.
나무 끝마다 화사한 꽃이 흐드러졌을 텐데,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면 꽃잎이 다 떨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이 열립니다.
김이 올라오는 머그컵을 든 위림입니다.
위림:(눈이 마주치면 버릇처럼 웃는다. 따뜻한 코코아가 담긴 머그컵을 내민다.) 푹 자는 것 같아서 안 깨웠어. 추현 삼촌도 아직 안 오셨고….
그렇다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주었던 걸까요?
다정한 행동입니다. 지난 새벽이 문득 상기될 만큼······.
양사비의:…… (고맙다는 말도, 잘 잤냐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숨을 터뜨리듯 묵힌 말을 뱉어냈다.) 나 악몽꿨어.
위림:(침대 가장자리로 가 옆에 앉는다. 악몽이라는 말에 꿈에서 본 걸 지우려는 것처럼 가볍게 네 눈가를 문질러준다.) 무슨 꿈이었는데?
양사비의:……솔직하게 얘기해도 돼?
위림:당연하지.
양사비의:네가 옥상에서 사람 밀어버리는 꿈.
엄청 화냈어. 네가 그렇게까지 소리를 높일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걔가 죽은 게 아직도 내 안에서 너무 큰 충격으로 남았었나봐.
위림:(미미하게 웃는 얼굴로 눈만 끔뻑이다가, 네 어깨에 툭 기댄다.) 괜한 거 보게 했네, 내가……
양사비의:그 날 일,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주면 안 돼? (저 역시 머리를 기울여 네게 기댄다.)
걔가 널 아주 많이 화나게 했어?
위림:비밀로 하고 싶은데. (습관처럼 허리를 껴안는다.) 응, 아주 많이 화나게 했어.
양사비의:왜? (네게 몸을 가까이 밀착시키며 되물었다.)
위림:내가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해서.
양사비의: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하기 이전에는, 걔가 그렇게까지 밉지는 않았던 거지?
위림:그랬을지도 모르고. (품에 고개를 묻는다.) 이제 싫은 얘기 그만 할래. 너랑 있는데 왜 걔 얘기를 해야 돼.
양사비의:그래야 내가 악몽을 또 안 꿀 것 같아.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왜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는지.
알아두는 게…… 속이 편할 것 같아서. 그냥 나도 공범으로 만들어줘.
위림:경찰에 넘기려고 이러나 했더니, 공범 되려고 그런 거였어? (부러 농조로 얘기하고는 짧게 웃는다.)
그냥… 그게 다야. 싫은 짓만 하고, 방해되고, 짜증나서 그랬어.
양사비의:뭉뚱그리기는. (그렇게 단정했다.)
그런데 더 물어보지는 않을게. (여즉 머그컵을 감싸쥔 네 손을 감싼다.)
대신 나중에, 아주 나중에…… 언젠가 때가 되면 다 가르쳐 주는거다?
위림:알았어. 벼락 맞은 것처럼 느낌 왔을 때 다 알려줄게. 바보같이 착한 여자친구. (시시덕거린다.)
그나저나, 빨리 코코아 마셔봐. 나 이번에도 물 많이 넣었을지 걱정돼.
양사비의:나 일어났을 때 멋지게 건네주려고 직접 타온 거야? (그제서야 옅은 웃음을 지었다.)
(잔을 건네받고 느릿하게 한 모금을 넘겼다. 솔직히 조금 밍밍하긴 했지만, 이렇게 달지 않은 따뜻함이 좋아서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맛있다.
위림:당연히 따뜻한 건 갓 만들어서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잖아. (기대하는 눈빛으로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잠자코 지켜보다가, 맛있다는 말에 빙글 웃는다.) 진짜? 이번엔 물 조절 잘 했어?
양사비의:딱 내가 좋아하는 농도로 탔어.
림, 나 봐봐. (그렇게 시선을 마주하면 고개를 숙여 입술을 포갠다. 코코아의 달콤함을 나눴다.)
위림:(맞닿은 입술이 따뜻하고 달콤했다. 코코아가 키스 맛인 걸까, 키스가 코코아 맛인 걸까….)
(입술이 떨어지고 나면, 괜히 입맛을 한 번 다셨다. 입 안에 남은 코코아 맛을 조금 더 음미했다. 솔직히 말해서 밍밍하다.) 뭐 이렇게 달대. (짓궂게 웃는다.)
양사비의:남자친구. (림, 흔히 부르는 이름 대신에 이렇게 불렀다.) 오늘은 그래서, 언제 집에 돌아갈거야? 삼촌 오기 전까지는 여기에 있을 거야?
위림:너 그거 다 마시면 슬슬 가볼까 하고 있었지. 아저씨 언제 오실지 모르잖아. 이러고 있다가 들켜도 곤란하고.
양사비의:……나 그럼 더 안 마실래. (이렇게 괜히 어리광을 부린다.)
위림:바보 여자친구 아니랄까봐. (볼에 쪽, 입 맞춘다.) 집에 가지 마?
양사비의:가지 마. (이윽고 잠깐 정적이다.) 농담이야. 집에는 가야지.
위림:진짜 가지 말라고 그랬으면 이참에 살림 차리려고 했는데. (농담으로 받아친다.)
집 가는 길, 바래다 줄 거지?
양사비의:…… (봄방학 내내 네가 우리집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곳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고 같이 있으면, 경찰이 와도 어쩐지 안전할 것 같다는 근거없는 확신이 든다.)
……응. 그럴게.
대신에…… 너 집 돌아가면, 나랑 계속 통화해야해. 악몽 꾼 것 때문에 기분이 조금 이상해서 그래.
위림:너 잠들기 전까지 해줄게. (자신보다 좁은 어깨에 고개를 부빈다. 자신보다 한참 큰 곰인형 품에 안기는 것처럼.)
(문득, 비 오는 창밖을 본다.) 집에 가기 싫다. 밖에 비도 오고, 매일 너랑 이러고 있으면 행복할 텐데…. 그래서 어리광 덜 부리는 남편이 되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려고. (말 끝에 웃음이 묻어난다.)
양사비의:아, 너 우산도 안 가져왔겠구나. (코코아가 평생 동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식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에 영원히 고정돼서, 봄방학이 끝날 즈음에야 로드를 하듯이 풀려났으면 좋겠다.)
(식어가는 코코아를 협탁 위에 내려둔다. 이제 일어나자는 모종의 신호였다.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눌러담고, 어리광 덜 부리는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다.)
위림:대신 너랑 같이 한 우산 쓰고 걸을 수 있지. (우산 없이 비 오는 날의 제일 좋은 점이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한 우산 아래에 있을 수 있다는 것. 헤어지는 길이라는 것만 고려하지 않으면 그것도 꽤 큰 행복이다.)
(협탁 위에 놓인 컵과 상대를 번갈아 바라본다. 눈썹 끝이 내려간다.) 나 벌써 보내려고?
양사비의:(양손으로 네 양뺨을 잡고 문질문질, 애정을 담아 쓰다듬는다.) 어리광 덜 부리고 똑부러지는 아내 되려고. 어차피 서로 집 가서도 계속 통화도 할 거니까.
위림:(눈을 내리감고 손길을 받다가, 손이 떨어지면 그제야 눈을 뜬다.) 난 어리광 많은 아내도 좋은데. (네 뺨에 다시 쪽, 입 맞춘다. 마주보는 눈빛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난다.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알았어. 나 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
양사비의:나도 너 나가면 옷 갈아입어야겠다. … (아마 내가 아쉬운만큼 너도 아쉽겠지. 나의 아쉬움보다 네 아쉬움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있잖아, 오므라이스는…… 오늘 아침으로는 안 되겠지만, 내일 네가 우리 집으로 또 놀러오면 그 때 해줄게.
아니면 내가 네 집에 재료 사들고 가서 해줘도 되고. (나가려는 널 향해 말했다. 지난 약속을 못 지키게 된 것이 내심 속으로 걸렸던 까닭이다.) 괜찮지?
위림:그럼, 당연히 괜찮지. 네 생각 하면서 오래 설렐 수 있는 기회잖아. (천천히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방문을 열고 나서려다가, 아, 하며 뒤돌아본다.) 티 코스터, 안 잊었지? 나 그거 받겠다는 핑계로 온 건데.
양사비의:...아.
(협탁 위에 잘 올려뒀던 꽃모양 코스터를 들어올려 네게 내민다.) 포, 포장이라도 제대로 하고 싶었는데……
그때 갑자기 경찰이 찾아오는 바람에…… 이렇게 덜렁 주자니 너무 민망하고 부끄럽네. (고개를 푹 숙인다.)
위림:뭐 어때. 나 주려고 뜬 거잖아. 그거면 됐어, 난. (티 코스터를 건네받고는 조심스레 매만져본다. 실로 이루어진 건데도 잘못 만지면 깨질 것처럼 극진한 손길이다.)
(날 위해 만들어준 것, 오로지 날 위해, 내게 주려고…….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어 내키는 대로 미소짓는다. 제법 행복해 보이는 낯이다.) 여태 받은 선물들 중에 제일 좋아.
양사비의:……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다. 저게 뭐라고 저렇게 환하게 웃어주는거야. 낯뜨겁게.)
(멋쩍은 얼굴로 널 흘긋거리며 보다가, 네 어깨를 가볍게 밀며 바깥으로 보낸다.) 자, 이제 옷 갈아입고 와. 나도 옷 갈아입을 거야.
위림:응, 알았어. 금방 갈아입고 올게. (기쁜 얼굴로 네 입술에 입 맞추고는 방 밖으로 나선다.)
(방 문을 닫은 뒤에도 티 코스터를 매만졌다. 손에 실의 감촉이 느껴지는 게 꼭 네 애정을 손으로 만지는 것 같아서 자꾸만 웃음이 샌다. 이런 작은 걸로도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니, 사랑은 참 이상한 거라니까….)
(코스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걷다가 욕실을 지나칠 뻔했다. 뒤로 두어 걸음 돌아와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양사비의:……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리면 옷장 앞에 서서 입을 만한 옷을 대충 꺼내 환복한다. 악몽의 여파가 후두둑 떨어지지 못하고 몸에 찐득하게 붙어있는 기분이었다.)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이 모든 세상이 가장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이 사랑을 간직한 채 너를 바라보기만 해야한대도 좋다. 그저 네게 어떠한 불행도 닥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 꿈이 자꾸 엉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옷을 마저 갈아입었다. 널 찾으러 방을 벗어난다.) 림, 다 입었어?
위림:(잘 보이는 곳에 티 코스터를 내려두고 옷을 갈아입는다. 머리까지 깔끔히 하나로 올려 묶고 나면, 어제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던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너랑 함께 있는 하루를 계속해서 반복할 수 있다면, 그것도 꽤 행복하지 않을까.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를 좋아하고, 함께하고, 같이 잠들고 깨면서 시간을 보내면 되는 게 전부일 텐데. 제 입으로 바래다달라고 해놓고 막상 헤어지려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거울을 바라보고 있자, 문 밖에서 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응, 다 입었어. (마저 외투를 걸치고 조심히 티 코스터를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욕실 밖으로 나선다.)
이러니까 꼭 어제 왔을 때 같지 않아?
양사비의:(너를 빤히 바라보다가 괜히 실없는 소리나 한다.) 삼촌한테 오늘 오지 말고, 내일 오라고 할까?
그래서 처음 사귀는 것부터 다시 해서, 영화 보고, 라면 먹고, 하룻밤 더 잘까?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앎에도 말은 그렇게 했다. 네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 위에 고개를 기울였다 바로 세운다.)
위림:그럼 행복하긴 하겠다. (잘게 웃으며 가까워진 머리 위에 입 맞춘다.) 역시 하루는 좀 아쉽단 말이지…. 다음에 올 때는 이틀 자고 가야겠어. (네 손을 단단히 깍지 껴 잡고 계단 아래로 함께 내려간다.)
양사비의:삼촌 내쫓는 불효조카가 되는 한이 있더래도 바깥에서 주무시라고 해야겠는 걸…… (같이 손을 단단하게 맞잡고 밑으로 내려간다. 아, 봄방학아. 느리고 빠르게 지나가버려라. 그래서 이 불안이 하냥 덧없다는 걸 증명해주렴.)
어느새 현관입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우산은 하나밖에 없네요.
자주 혼자 있던 집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릅니다.
위림:오늘도 너 불효조카 만들 뻔한 거, 우산 하나라서 넘어가는 거야. (시시덕거리며 우산꽂이에 하나 걸려있는 우산을 집었다.) 우산은 내가 들고 갈게. 재워준 보답… 이라기엔 뭐하지만, 아무튼.
양사비의:(조금 웃었다.) 든든한 남자친구네.
(신발을 갈아신고 현관문을 연다. 빗소리가 상당하다. 우산이 펼쳐진다. 그리고 너와 나 사이에 드리워지는 우산 그림자. 둘이 내딛는 첫 발자국은 아쉬움의 찰박 소리다.)
함께 나서는 밖, 비에 젖은 땅에서 찰박이는 소리가 울립니다.
차라리 비가 더 매섭게 왔다면, 더 오래 함께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깁니다.
그새 생긴 웅덩이를 피하고, 좁은 골목을 자동차가 지나갈 때면 한쪽으로 몸을 붙이고…….
그렇게 한참이나 걷다 보면 무언가 살짝 걸리적거립니다.
고개를 들어보면 우산에 손가락의 지문만큼 자그마한 것이 잔뜩 붙어있습니다.
우산살 사이로 그림자가 얼룩덜룩하게 보입니다.
위림이 우산을 살살 흔들어 죄다 털어버리자, 젖은 벚꽃잎이 웅덩이로 떨어집니다.
꽃잎 내린 우산은 보기 좋습니다. 그야말로 봄이잖아요.
그러나 위림은 마치 곰팡이라도 본 듯 미간을 찌푸립니다.
양사비의:왜 그래? (꽃잎 떨어지는 게 저렇게 싫을 일인가. 가볍게 물어본다.)
위림:벚꽃 싫어서. (언제 그랬냐는 양 우산을 다시 반듯하게 든 채다.)
양사비의:벚꽃…… 원래 싫어했어?
위림:(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그냥 봄이 별로기는 해. 그래도 너랑 본 벚꽃은 좋았어.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더라.
양사비의:봄이 왜 별로였으려나. 날 따뜻하고, 잠 잘 오고, 낮도 길어지는데도?
위림:사람들이 다 행복하다는 것처럼 웃고 있잖아. 네 남자친구는 심보가 못 돼서 남이 웃는 걸 보면 마음이 불편해. (남 얘기하듯 가벼운 어조다.)
그리고… 봄만 되면 그전에 뭐가 있었던 간에 다 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싫어.
양사비의:…… (꿈의 내용이 되살아나니 기분이 약간 미묘해진다. 평소의 담담한 표정으로 감추듯 덮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나는 좋아해, 봄.
네가 왜 싫어하는지 이해도 하지만. 그래도 너랑 이렇게 마주볼 수 있게 된 계절을 싫어하기는 힘들 것 같아. (모든 회차마다, 봄날의 너를 지켜보는 건 참 즐거웠으니까.)
위림:내 여자친구가 그렇다니까 나도 좋아해볼게. (남은 한 손으로 상대의 허리를 가볍게 껴안는다. 잠시 생각하는 듯 네 쪽으로 고개가 슬금 기운다.) 흠, 그럼 봄의 좋은 점이 늘었네.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계절이라는 거랑, 네가 좋아하는 계절이라는 거.
양사비의:(얌전히 그 손에 이끌려 몸을 가까이 붙인다. 습도는 최악이고, 바지끝은 벌써 젖었다. 그렇게 불쾌한 조건이 가득했지만 네가 바로 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많은 것들이 괜찮아진다. 또박또박한 말투로 마저 답한다.) 너랑 있으면 사실 어떤 계절이든 다 좋을 것 같아.
위림:(하늘이 캄캄한 탓인지, 아니면 젖은 땅에서 타고 올라오는 습기처럼 천천히 스며들어오는 우울 탓인지, 눈동자에 옅게 내려앉아있던 어둠이 순식간에 걷힌다.) 진짜? 여름은 말도 못하게 덥고, 가을은 이파리 다 떨어져서 휑하고, 겨울도 엄청 추울 텐데. 나랑 있으면 그것도 다 좋아?
양사비의:여름은 서로 번갈아가면서 부채질 해주면 되고, 가을은 그래도 날이 맑잖아. 같이 소풍가자. 겨울되면…… 다음 해에도 같은 반 되자고 내내 둘이서 빌면 되겠다. 크리스마스도 축하하고, 연말도 함께 기념하고.
그러니까, 뭐…… 너도 나랑 비슷하게 생각해주면 좋긴 하겠다.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봄은 모든 사람들이 웃고 있지만, 아마 나도 너 때문에 웃고 있을 거야.
그전에 뭐가 있었던 간에,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 오랜 시간 친구였지만, 그래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서 네가 내 '남자친구'가 된 거고.
전부 생각하기 나름일 거야. 아마도.
위림:(너도 나 때문에 웃고 있을 거라고. 무어라 토해내려던 말은 끝내 꾹 막힌 목구멍 너머로 뱉어지지 않는다. 입 밖으로 내는 대신 껴안은 손에 힘을 준다.) 그러니까 봄도 썩 나쁘진 않네…. 이번 봄 아니었으면 우리도 이렇게 나란히 걷게 될 일 없었을 테니까.
여름에 선풍기 앞에 나란히 앉아서 바람 쐬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가을에 낙엽 갖고 장난쳐도 재밌을 것 같아. 겨울엔 내 패딩 안에 너 집어넣고 다닐래. (웃음기 섞인 어조로 얘기한다. 함께하는 날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봄과 미래를 향한 미움이 덜어진다.)
근데, 그럼… 지금도 좋아? 비도 많이 와서 길에 웅덩이도 많고, 옷 밑단이랑 소매도 다 젖었고, 습하고 눅눅한데.
난 좋아. 습하고 눅눅하고 쫄딱 젖어도 행복할 것 같아.
양사비의:난 여기서 당장 우산 접어도 좋다?
같이 비 맞으면서, 물 빠진 생쥐 꼴로 걸어도 좋아.
위림:그건 싫어. 바보 여자친구 감기 걸리면 어떡해.
아, 그럼 병 간호해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가?
양사비의:그치. 간호한다는 명분으로 우리 집 오면 되잖아. (그런 소리를 하면서 네 품을 벗어나 우산 바깥으로 한 발자욱 옮기려 한다.)
홀딱 젖었다는 핑계로 네 집에 들러서 씻고가도 되는 거고.
어떻게 할래. 습하고 눅눅하고 쫄딱 젖어도, 행복한지 확인해볼까?
위림:(한 걸음 멀어진 상대를 가만히 바라본다. 곧 웃음을 터뜨린다.)
(우산을 옆으로 치웠다.) 같이 비 맞으면서 물 빠진 생쥐 꼴로 걷자, 그럼.
양사비의:(네가 우산을 접을 때까지 기다렸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이 정수리부터 어깨까지 빠르게 적셔간다.)
(그 사이 내내 부드러운 웃음을 그렸다. 네 검은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어 살갗에 엉겨붙기 시작하면, 네 손목을 잡고 비를 피하듯 가볍게 달려나간다.)
위림:(우산을 접자마자 비가 곧장 머리 위로 쏟아진다. 머리카락에서 어깨를 지나 소매까지, 순식간에 비에 젖어들었다.)
(너와 걸음을 맞추어 비슷한 속도로 달린다. 온통 젖고 축축해도 행복하다. 습한 공기도, 젖어드는 옷자락도, 달려나가며 밟게 되는 물 웅덩이마저도, 전부 행복하다.)
(꽃잎은 이미 바닥에 떨어지고, 부드러운 봄바람 대신 눅눅한 공기 뿐이어도, 그 어떤 맑은 날의 봄보다 행복한 봄이다.)
(달리는 내내 웃음이 샌다.) 어떡해? 기분이 너무 좋아.
양사비의:(습하지만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운다. 이렇게 실실 웃어본 적이 없다. 목 끝까지 차오른 것이 숨인지 해방감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바닥을 딛으면 다 젖은 신발 밑창과 양말에서 물이 삐쭉 나왔다. 손 틈새로 물이 스며 미끌거리니 아예 손과 손을 단단히 깍지 껴서 잡는다.)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지지는 못하는 나무 아래에 잠깐 멈춰선다. 그리고는 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비 맞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다 젖으니까 오히려 더 시원하고.
위림:(그새 차오른 숨을 고르다가도 연신 웃었다.) 그러게, 아예 눅눅해지니까 습한 것도 잘 모르겠어.
(습한 공기로 안을 여러 번 채우고 나서야 숨이 진정됐다.) 나 혼자 맞았으면 쫄딱 젖었다고 싫었을 것 같은데… 너랑 같이 한다는 게 좋은 거긴 한가봐.
이러다가 싫어했던 것도 너 덕분에 다 좋아져버리는 거 아닌가 몰라. 그랬다간 사는 게 너무 행복해질 것 같은데. (빗물에 젖어 미끌거리는 손을 다시 한 번 고쳐 잡는다. 온통 서늘한 것 속에서도 맞잡은 손만큼은 선명하리만큼 따뜻했다.)
(축축하게 젖은 너를 가만 바라보다가, 비에 젖어 뺨에 늘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준다. 그러고는 곧장 팔을 벌린다.) 안아주면 안 돼?
이 상태로 안으면 어떨지 궁금해.
양사비의:(그 말이 끝나자마자 거리낌도 없이 네 몸을 꽉 끌어안는다. 습하고 축축한 내음이 훅 밀려들어온다.) 이렇게?
아니면 더 세게 안을까?
위림:응, 그렇게. 지금 딱 좋아. (품 안에 들어오는 몸을 마주 껴안는다. 축축한 몸끼리 맞닿아도 거북하지 않고 마냥 즐겁기만 하다.) 여기서 더 세게 안아주면 터질 것 같아. 좋아서….
양사비의:림, 나 봐봐. (마주안은 채로 고개만 살짝 뒤로 물린다.)
위림:(네 어깨 너머를 바라보던 시선이 네게로 향한다.)
양사비의:(그대로 입을 맞추려는 듯 밀착하지만, 코끝을 서로 맞대기만 하고 멈춘다. 애매한 거리를 남겨두고 고개와 고개는 서로 가까워지지 않는다. 빗물을 맞아 차가워진 호흡만 섞여들어간다.)
(고개를 살살 흔든다. 코끝이 서로 비벼졌다.)
위림:(입맞춤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네 고개가 멀지 않은 거리에서 멈추자 야속해진다. 맞비벼지는 코끝이 간지러워 잘게 웃음을 흘렸다. 꼭 비벼질 때마다 애정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간지러워. 뭐야, 이게.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마주보는 시선이 고요해진다.) 더 가까이 오면 안 돼?
양사비의:(먹구름이 껴서 햇빛은 하나도 없고, 주변은 어둑하지만 네 보라색 눈동자만큼은 이 세상의 무엇보다 또렷하게 느껴진다. 그 시선이 내포한 애정, 아쉬움, 웃음, 그리고 욕심을 읽어내다보면 제 입가에 머물렀던 웃음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럴까?
(고개를 조금 더 가까이 붙인다. 아직 입술은 닿지 못했다.) ...이 정도로 가까이?
위림:(한층 더 가까워진 얼굴을 바라본다. 희고 투명한 눈동자는 바라볼 때마다 제 욕심과 마주하게 한다. 결국 참지 못하고 네가 가까워진 만큼 저 또한 거리를 좁혀 빗물에 젖어 서늘한 입술을 제 입술로 내리누른다.)
양사비의:……
(이럴 거라고 생각했고, 이러기를 바랐지만, 이렇게 홀딱 젖은 채로 입술이 닿으니 분위기에 한껏 취해버릴 것만 같다.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비는 세차게 내리고, 물방울이 나뭇잎을 타고 바닥에 투두둑 선명하게 떨어졌다. 와중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원해서 이렇게 입술을 포갰다. 주인공이 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아, (작은 신음을 흘렸다. 너와 내가 같이 봤던 파렴치한 영화에서는 상대가 침입하길 바라며 입술 사이를 벌렸었으니, 저 역시 그를 따라할 뿐이다.)
위림:(네 입술을 제 입술로 가볍게 베어물고, 다시 내리누른다. 마음 가장 안쪽이 간지럽다. 비가 와서 추위를 타는 걸까, 아니면 널 향한 애정이 마음을 비집고 나오는 걸까…. 느리게 눈을 내리감으면 빗소리와 품 안에 안긴 네가 내는 숨소리만이 느껴진다. 그것만이 내 세상을 만들고 있다.)
(맞닿은 입술 새가 벌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그 틈으로 파고든다. 호흡이 하나로 섞여 우리 사이를 잇는다. 나는 네 숨으로, 너는 내 숨으로 호흡하는 지금이 더없이 기쁘다. 네 숨이라면 조금도 흘리고 싶지 않다.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얼마 없던 틈마저도 없게 한다.)
양사비의:으, 응…… (키스라는 건 생각보다 더 숨이 가쁘고 노골적이다. 상대방의 입술에서는 살갗의 말랑함이나 호흡의 뜨거움은 느껴졌어도, 섞이는 타액에서 달콤함은 느껴지지 않더랬다. 입안에 모든 열기가 밀려가 손끝이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네 어깨의 옷감을 움켜잡았다.)
(이 입맞춤은 어디에서 끊어내야 좋을까? 키스를 관두는 타이밍같은 건 다들 어떻게 알아내는 걸까? 속이 참 요란스럽다. 차라리 그냥, 이 순간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 영원히 지금에 머물고 싶다. 너와 내가 가장 주인공스러운 지금 이때에 말이다.)
(한참이나 고등학생이 하기에는 다소 외설적이게 호흡을 섞고, 입안의 살덩이를 얽었다.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가를 따라 흘러내릴 것 같으면 그제서야 네 어깨를 손바닥으로 두어번 두드린다.) ......
위림:(차게 식어가는 살갗과는 다르게 심장박동은 터질 듯이 날뛴다. 아무런 의미도, 활력도 없던 삶이 너를 만난 뒤로 생을 얻는다. 비로소 살아있다는 게 뭔지 알 것 같다. 기쁘고 행복하고 심장 떨리는 일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면 좋겠다. 너와 나밖에 없는 세상에서, 같은 감정과 기쁨 속에서 영원히 행복할 수 있게. 서로가 서로만 오롯이 바라볼 수 있게. 분명 그것이 합리적이고 지당한 세계일 텐데…….)
(우습게도 너와의 영원을 생각할 때마다 불안이 발목을 잡는다. 나는 네가 좋은 만큼 무섭고 행복한 만큼 슬프다. 높은 곳에 올라 경치를 만끽하기도 전에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사람 같다. 해소하는 법도, 가라앉히는 법도 몰라 불안이 짙어지려는 만큼 계속해서 안으로 파고들고, 또 파고들다가…)
아, (뒤늦게 어깨를 두드리는 걸 알아채고 입술을 뗀다. 한창 열이 올랐던 호흡이 찬 공기를 만나 차갑게 식는다.) …미안, 이렇게까지 진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양사비의:아니야, 아니. 사과하지마. (당황해서 말에 속도가 조금 붙었다.)
(괜히 발끝을 세웠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다 젖어서 축축해진 신발코로 바닥을 툭툭 두드린다.) 나도 좋았어. 진짜야. 계속 이러고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어. ...
(그대로 몸을 겹쳐서 널 힘주어 안았다. 지금의 이 포옹이 나무 그늘 은밀한 스킨십의 마지막이라는 듯 이내 양팔에 힘을 풀고 네 손을 깍지껴 잡는다.)
키스라는 거 진짜…… 중독적이다. 더 진하게 해달라고 조르려는 걸 간신히 참은거야. 솔직하게 말하자면.
위림: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추잡한 남자친구 소리는 면하겠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엔 어떠한 걱정도, 음울도 없다. 물기 맺힌 손등을 엄지로 가볍게 어루만지다가, 네 어깨에 기대 고개를 부비적댄다. 영락없이 어리광을 부리는 형태다.) 어떡하지, 고등학생인데 이런 거 좋아져버려서…….
(그러다가 홱, 고개를 든다.) 나중에 또 하자고 하면…… 해 줄 거야?
양사비의:……나중에 하려고 하면, 어디에 사람없는지 잘 찾아봐야겠다. 개학하고 둘 다 학교에 있을 때 몰래 하고싶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두 번 물으면 입아플 정도로 저 역시 다음을 기약하고 싶다는 소리다.)
(이쪽도 고개를 기울여 네 정수리에 뺨을 붙이면, 서늘한 물기가 느껴졌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뜬다.)
이런 거 나랑만 해야해. (자신도 모르게 내뱉고는, 뒤늦게 정신을 차려서 말을 덧붙인다.) ...아니, 꼭 나랑만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서로 사귀고 있는 동안은, 꼭 나랑만. ...
위림:평생 너랑만 할거야. (깍지 낀 손에 힘을 준다.)
앞으로도 너 아닌 사람이랑 하고 싶다는 생각은 죽어도 안 들 것 같아.
그니까… 나랑 오래 같이 있어줘. 난 아무데도 안 갈 테니까. (다시 어깨에 기댄다. 꼭 이곳이 제 자리라는 양.)
양사비의:……말을, 이렇게 예쁘게 하는 줄 몰랐단 말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네 고백에 묻어나는 사랑스러움이 허용치를 초과해서, 이렇게 말로 토해낼 수 밖에 없었다.)
(발걸음을 느리게 옮겨가며 공소리를 던진다.) 만약에 네가 자라서 모델이 돼,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촬영 상대랑 입술을 붙이게 됐어.
그러면 감독님한테 이거 못하겠다고 얘기할 거야? '저는 제 여자친구랑만 하기로 했어요', 하고?
위림:(흠, 하고 턱을 매만진다.) 멀리서 따로 촬영하고 붙여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요새 기술이 얼마나 좋은데. 그 정도는 티 안 나게 붙여주지 않으려나.
그리고 애인 있는 사람을 남이랑 입술 붙이게 만드는 건 너무한 거 아냐? 그렇게 못한다고 하면 상대 너로 바꾸기 전까지 촬영 안 한다고 할래.
양사비의:……사실 이거 남자친구 테스트였는데, 백 점 줄게.
참고로 십 점 만 점이야.
위림:(짧고 경박하게 웃는다.) 바보 여자친구, 완소 퍼펙트 남자친구를 가진 소감은.
양사비의:(따라서 엷게 웃었다.) 완전 소중하고 퍼펙트해서 감격적이네요.
나만 알고 나만 보려고요. 다른 사람들 탐낼까봐.
위림:품에 숨기고 아무도 보여주지 마. 네 거라는 티도 팍팍 내고.
생각해보니까… 그러려면 반지가 제일 빠른가?
양사비의:어, 어...?
커플링 같은 거?
위림:응. 그럼 반지 보고 아, 애인 있는 사람이구나~ 할 거 아냐.
커플링…… (네 말을 따라하다가 가만 웃는다. 뒷말은 흘리듯 내뱉는다.) 있으면 좋겠다.
양사비의:맞추자, 그럼. (툭 뱉었다.)
대신에 좀 싼 걸로…… 너무 비싸면 내 용돈이 감당 못할 것 같아.
위림:(사준다고 하면 싫어하려나, 그렇다고 너한테 돈 달라고 하긴 싫은데. 남자친구 체면이 있지…… 혼자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연다.) 맘에 드는 걸로 사는 게 제일 좋긴 한데.
알았어, 일단. 그럼 나중에 결혼할 때 좋은 걸로 맞추자. 참고로 프로포즈는 내가 할 거야. 이거 선전포고인 거 알지? (시시덕댄다.)
양사비의:……
(……선수쳐야지…….)
(……수상하게 침묵이 길어진다…….)
위림:……
(가만히 보다가 볼을 쿡 찌른다.) 무슨 생각해? 내가 먼저 청혼해야겠다… 그런 거?
양사비의:……
아, 아닌데?
위림:(맞구만.) 그럼 무슨 생각 했는데?
양사비의:……
(안 되겠다. 뇌가 안 돌아간다. 엉뚱한 소리를 내던졌다.) 요, 즘은 여자가 프로포즈 하는 게 대세긴 하대…….
위림:(이런 쪽으로는 기민하지 못한 것마저도 귀엽기만 하다. 가볍게 볼을 꼬집었다.) 나한테 프로포즈 하고 싶어?
양사비의:당연하지.
나도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대로 준비해서 보여주고 싶어.
그러니까…… 프로포즈는 번갈아서 하기, 어때?
위림:(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라니. 그런 말을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좋아' 밖에 없다.) 알았어. 기대해도 되지?
나, 벌써 떨리는 것 같아. 네가 나 좋아하는 거 확인받는 것 같잖아…
양사비의:장래희망 <완소 퍼펙트 여자친구> 인 사람이 준비하는 프로포즈는 어떨지 기대해.
(장난기 담긴 소리를 뱉고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네 집으로 향한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으려나.)
위림:대체 얼마나 더 소중해지고 더 완벽해질 셈인 거지, 내 완소 퍼펙트 바보 여자친구는. (볼에 짧게 입 맞추곤 웃는다. 하늘을 보니 그새 비가 제법 그쳤다.)
(아무도 없는, 오로지 비와 우리뿐인 거리다. 걸음을 맞추어 걷다가 한 길목에 멈춰선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 거의 다 왔으니까.
(너와 마주보고 서서 양손을 부드럽게 쥔다.) 오늘 저녁쯤에 비 완전히 다 그친다니까, 내일 놀이공원 가자. 가줄 거지?
양사비의:(두터웠던 먹구름도 어느새 홀쭉해지고, 빗줄기도 많이 약해졌다. 한시간만 지나도 하늘은 서서히 맑아질 것 같았다. 길목에 나란히 멈춰서서, 예상 밖의 무언가를 들었다는 듯이 눈을 깜박거린다.) 놀이공원? 어디에 있는 놀이공원?
위림:지하철 타고 갈 수 있는 곳 있어. 멀지 않으니까 금방 갈 거야. 가서 롤러코스터도 타고, 관람차도 타고, 솜사탕도 먹자. (소풍 나가는 아이마냥 기대하는 눈빛이다.) 응?
양사비의:…… (손을 들어서 네 눈가 아래를 문질러준다. 정확히 하자면 맺힌 물기를 닦아주는 행동에 가까웠다.) 응, 그러자. (그러고는 웃는다.) 네가 하자는 거 다 해줘야지.
위림:(제게서 완전히 손이 떨어지기 전에 손바닥에 가볍게 부빈다.) 기대된다. 가서 사격도 해야지. 커다란 곰인형 따서 너 줄래.
양사비의:나는 곰인형보다 너 닮은 고양이인형이 더 좋은데…… (집에 돌아가자마자 삼촌한테 내일 놀이공원에 갈 예정이라고 얘기할 계획을 세운다. 놀이공원이라, 학교 소풍으로 갔던 걸 제외하면 가본 기억이 드무니 자연히 기대가 차오른다.)
위림:고양이 인형으로 따주면 매일 그거 보면서 내 생각 해 줄 거야?
양사비의:잘 때도...
끌어안고 잘 건데?
위림:(미미하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뭐야, 진짜……
바보.
(꼭 고양이 인형으로 따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내일 네 집으로 갈게.
양사비의:(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알았어. 잘 들어가.
꼭 따뜻한 물에 씻고.
저녁도 맛있는 걸로 먹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헤어지기 싫다.) 내일도 기다릴게. 언제쯤 우리 집에 올 거야?
위림:응, 너도 꼭 따뜻하게 씻고 맛있는 거 먹어. 갔는데 감기 걸려서 훌쩍거리고 있으면 가만 안 둬. (아, 집이 코앞인데. 가기 싫다. 반 발자국 다가선다.) 글쎄, 아침에 가야 사람이 적으니까 좀 일찍 갈 것 같아.
양사비의:아, 그럼 일찍 오겠네. 한… 아홉시 쯤? (네가 다가오는 걸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위림:응. 그쯤 갈 것 같아. 벨 눌렀는데 안 나오면 네 방에 깨우러 가도 되지? (더 다가서지는 않는다. 이대로 움직였다간 다시 네 집까지 갈 게 분명하다.)
양사비의:응. 그래도 돼. (그대로 거리를 좁히지도 못하고, 늘리지도 못한 채 네 얼굴만 보다가, 퍽 멋쩍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
(비는 어느새 그쳤고, 물웅덩이를 밟아 네게 달려간다. 그대로 목을 끌어안았다.)
나 이제 진짜 갈게. 잘 들어가.
통화하는 거 잊지 말고.
알았지?
위림:(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몸을 품 안 가득 껴안는다. 머리 위로 고개를 묻었다가 그 위에 한 번, 그리고 네 입술에 한 번 짧게 입 맞춘다.)
조심히 들어가. 이따 저녁 먹고 전화하고.
(애정어린 미소를 짓는다.) 사랑해.
위림이 손을 흔들며 멀어집니다.
둘이 온 길을 혼자 돌아가려니 제법 적적합니다.
나란히 보폭을 맞춘 걸음이 아닌데도 어쩐지 돌아가는 길이 멀고 또 느립니다.
집에 도착하자, 그제서야 그새 비에 흠뻑 젖어 축 달라붙은 옷과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습니다.
내일도 분명 일찍 일어나 바쁘게 보내게 될 테니, 몸을 정돈한 뒤에 일찍 침대에 눕는 게 좋겠습니다.
양사비의:(집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무음 모드에서 벨소리 모드로 바꿔놓고, ─언제 네 연락이 올지 모른다─ 곧장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다.)
(아직 저녁을 먹지는 않았고,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휴대폰을 들어 네 번호로 통화 버튼을 누른다.)
응, 림. 바로 받네? (작게 웃었다.) 응, 씻고 머리도 말리고 잠옷으로도 갈아 입었어. 응, 응……
(수화기 건너로 네 목소리가 들리자 누가 봐도 얼굴에 화색이 돈다. 휴대폰을 얼굴에서 떨어뜨려놓을 생각도 못하고, 뺨에 붙인 채로 침대에 들어가 밤을 보냈다.)
알아, 나도 사랑해.
잘 자. 내일…… 아니, 오늘 아침에 봐.
양사비의:(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고양이 인형이 없으니 대신해서 여분의 베개를 너라고 생각하면서 끌어안았다. 어서 낮이 왔으면 좋겠다.)
침대에 누우니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눈꺼풀이 무겁습니다.
비에 젖어 늘러붙었던 옷처럼, 수마가 온몸에 달라붙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잠에 빠지면……
어김없이, 또 꿈속입니다.
엎드려 있었던 몸을 일으키면, 익숙한 교실이 보입니다.
비의, 관찰 판정!
양사비의: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7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교실 안은 낯익은 곳입니다.
보통 어느 학교나 교실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신이 확신할 수 있는 풍경이 있습니다.
오후 열두 시 반을 가리키는 벽시계라든가, 칠판에 남아있는 분필 자국이라거나, 게시판에 붙어있는 학급 유인물 등…
이곳은 분명히 당신이 재학하는 학교의 교실입니다.
그리고 저 끝에, 앉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나무토막처럼 바른 자세로 앉은 채 정면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생기 없이 멍한 시선만 두고 있는 얼굴은 거울을 보고서 따라해보려고 해도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얼굴 근육을 사용한 적이 없는듯한,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얼굴에 당혹스러울 지경입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한 사람이 앉아있습니다.
위림이 바로 옆자리에 앉은 채 꿈속의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위림:이 시간에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냥 이러고 있었구나. ……
위림은 당신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중얼거립니다.
위림:뜨개질 좋아하는 건… 정말이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비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자리에 그대로 엎드립니다.
두 사람의 앞에는 단 한 권의 책도, 필통도 없습니다.
한 사람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고, 한 사람은 조용히 응시하기만 하는 이 풍경은 꿈이라서 가능한 걸까요?
정말 이상한 꿈입니다.
하지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제3자의 위치에서 당신을 보는 기분이 어떤가요?
혹시, 제법 특별해진 기분이 들지는 않나요?
이 세상으로부터 선택받은 존재가 오직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의도와 감정, 속내라 하더라도 정당한 당신만의 몽상입니다.
이 모든 일이 정말 일어났던 것처럼 느껴진다면 어처구니없는 망상이겠지만,
그래도, 왠지 익숙한 것도 같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 1D30 상승합니다!
양사비의:28
겹쳐지지 않는 시선 속에서 서서히 습한 공기가 개이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꿈에서, 당신은 위림을 바라봅니다.
위림은, 당신을─ 비의를 바라봅니다.
Chapter 5. 특별한 너와 함께 하는 원더랜드
어쩌다 보니 이곳에 있는 거죠?
손목에 놀이공원 티켓마저 두른 채로 이곳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봅시다.
길고도 오랜 꿈을 꾸었습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빠듯해지는 꿈이요.
얼마 뒤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문을 열자마자 이끄는 손이 있었습니다.
잠에서 막 깨어났는데,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바쁘게 준비하고 나와 나란히 걷게 되었죠.
사람들 사이를 걷다가, 뛰다가, 줄을 서다가. 그런 걸 반복하다 보니 정신이 들었는데······.
위림:이제 좀 잠이 깼어?
위림이 태연하게 말합니다.
어쩐지 어제는 목적지를 미리 알려주더니, 아침부터 이렇게 바쁘게 움직일 마음이었던 건가요.
양사비의:……어, 어제 일찍 잘 걸 그랬나봐. 통화 덜 하고.
넌... 안 피곤해?
위림:너랑 놀 생각에 하나도 안 피곤해. (딱 '놀이공원 와서 들뜬 애'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다. 잔뜩 신나고 잔뜩 기대한 얼굴로 웃는다.)
양사비의:(네 어깨에 고개를 푹 묻는다. 네가 보지 못하도록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한 뒤에 고개를 들었다.)
(손으로 눈가를 가볍게 비비고,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 그거 없나? 팜플렛.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한데...
위림:(주변을 둘러보다가 놀이공원 입구에 놓인 안내 책자를 발견한다. 하나 집어 손에 들려준다.) 자, 여기.
양사비의:돌아다니다가 카페 있으면 안에서 커피 한 잔만 마시자. (그런 소리를 하면서 책자를 촥 펼쳐 본다.)
위림:그럴 줄 알고 데이트 코스에 카페 추가해뒀지. (시시덕거리며 옆에 바짝 서 같이 책자를 본다.)
큼직한 팜플렛에는 <대길랜드>의 지도가 있습니다. [회전목마]가 가장 먼저 눈에 띄고, 그 근처에는 무섭기로 소문난 [롤러코스터]도 있습니다. [아이스크림 가게]와 [사격장]도 보이네요. [관람차]는 놀이공원의 가장 가운데에 있습니다.
양사비의:자. (책자를 같이 볼 수 있도록 사이에 두며 말을 잇는다. 질문과 함께 시선이 상대방에게 닿았다.) 먼저 가고 싶은 곳 있어?
위림:(책자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눈동자가 한 군데서 멈춘다. 검지로 회전목마를 가리킨다.) 원래 놀이공원의 시작은 회전목마거든.
양사비의:……그런거야? (흘긋 본다.) 몸풀기?
위림:그런거지. (마주본다.) 몸풀기.
양사비의:(슬그머니 다가가서 손을 맞잡는다.) 그러면 회전목마로 가자. 데이트 전문가 남자친구가 말하는대로 다 따를게.
위림:(맞잡은 손 사이로 파고들어 깍지를 낀다.) 오늘 하루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여자친구님. (장난 가득한 얼굴로 웃고는 회전목마 방향으로 걸어간다.)
주변에서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은 죄다 어린아이들입니다.
혹은… 우리같은 연인이거나.
적당한 속도에서 눈을 맞추기에 좋은 놀이기구이긴 하죠.
마침 딱 우리까지 입장했습니다.
들어가고 나면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호박 마차]와 [말]이 보입니다. 어디로 가서 앉는 게 좋을까요?
양사비의:(호박 마차와 말을 번갈아서 바라보다가, 말쪽으로 걸어간다.)
위림:음, 그럴 것 같더라. 역시 호박 마차는 좀 그렇지. (얌전히 따라간다.)
마침 딱 두 필이 남아있습니다. 고삐와 안장이 붙어있는 게 꽤 그럴듯합니다.
늦지 않게 올라탑시다! 떨어지지 않으려면 민첩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재빠르게 올라탄다면 민첩 판정, 힘으로 버텨보겠다면 근력 판정해 주세요!
양사비의:(후다닥 걸어간다.)
민첩
기준치: 70/35/14
굴림: 83
판정결과: 실패
멋지게 올라타려고 했지만!
아쉽게 미끄러집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회전목마라 하더라도 만만히 봐서는 안됩니다…
양사비의:...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위림이 말합니다.
위림:고삐가 길어서 그래. 내 손 잡고 타. (손을 내민다.)
양사비의:(멋쩍게 손을 잡고 올라탄다.)
이상하다, 나 체육 뜀틀도 만점인데...
위림:괜찮아, 귀여웠으니까 됐어. (말 위에 올라타는 걸 보고 나서야 손을 놨다.) 가끔 이렇게 허당일 때도 있어야지.
양사비의:(말 목의 위로 솟아오른 안전봉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는다.)
뭐…… (귀여웠다니까 다 됐으려나. 네게 흉하게 보이지만 않으면 됐지. 그렇게 갈무리하고 안내방송을 기다린다.)
곧 안전사항에 대한 짧은 방송과 함께 회전목마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립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고, 천천히 돌아가며 보이는 풍경이 꿈결처럼 보입니다.
빙글거리며 돌아가는 회전목마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습니다.
위림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좋은 하루의 시작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전목마는 멈추고, 아이들은 열린 문을 향해 쏟아지듯 달려 나갑니다.
이제 우리도 나가볼까요?
위림:몸 잘 풀었다. 역시 회전목마로 시작해야 기분이 좋아. (먼저 말에서 내린다. 네 앞에 서서 가만히 손 내밀고 기다린다.)
양사비의:…… (이 모든 순간들이 다 처음이다. 놀이공원을 온 것도 손에 꼽는데, 그 흔치않은 경험을 지금 너와 함께 보내고 있다.)
(그 어색하고 수줍은 감상을 곱씹느라 반응이 느렸다. 손을 느릿하게 맞잡았다. 네게 제 무게를 지탱하며 밑으로 내려온다.) 나도, 혼자서 내려올 수 있는데. ...
그렇지만, 고마워. (작게 웃었다.) 방금 그러니까 엄청 남자친구 같았어.
위림:남자친구랑 와야 할 수 있는 거라고, 이런 거. 언제 또 이런거 해보겠어. (네가 아래로 내려오고 나서도 손은 놓지 않는다.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걷는다.) 같이 와서 좋지?
양사비의:응. (바로 답한다.)
데이트, ...사실 상 처음 해보는 거잖아.
안 좋을 수가 없는 것 같아.
위림:(오늘 하루는 내내 웃게 만들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네 첫 데이트 상대가 나라서 좋아.
너 행복하게 만들어준 게 내가 처음인 거잖아.
양사비의:(괜히 손에 힘을 꽉 주었다가 놓는다.) 그러는 너는?
이런 식으로 행복해진 거... 내가 처음이야?
위림:응. 당연히 나도 네가 처음이야.
양사비의:...더 행복해졌어. 그 소리 들으니까.
이제 어디 앉아서 잠깐 뭐라도 먹자. 너무 허겁지겁 나와서 목도 조금 마른 것 같아.
위림:바보 여자친구. 은근 욕심 많다니까…. (네 뺨을 가볍게 간지럽히고 주변을 둘러본다.) 아이스크림 가게 갈까? 거기서 음료수도 팔 것 같은데.
양사비의:(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면 차가운 커피도 팔겠지? 말없이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욕심, 많아진 건... 내 잘못이긴 해도 내 책임은 아니다?
위림:난 욕심 많은 사람 좋아. 욕심 더 부려도 돼. (네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때를 생각하다 보면, 무슨 욕심이든 자연히 다 들어주게 되는 법이다. 아이스크림 가게 쪽을 향해 걷는다.)
양사비의:아. (아이스크림 가게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발길을 잠깐 멈춘다.) 림, 이거 봐봐.
(풍선이며 머리띠며 다양한 기념 물품을 파는 이동식 가게 앞에서 걸음을 세웠다. 개중 검은 고양이 귀가 달린 머리띠를 가리켰다.) 이거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
위림:(걸음을 맞춰 걸으니 네가 멈춰서면 자신 또한 멈추게 된다. 고양이 귀 머리띠를 가만히 보다가, 어제 네가 말했던 고양이 인형을 떠올린다.) 나, 너한테 그런 이미지구나….
(매대를 살피다가 곰돌이 귀 머리띠를 집어 피할 새도 없이 씌워버린다.) 난 이거. 잘 어울리네, 귀엽고.
양사비의:……
(손을 들어서 둥그런 귀를 매만지다가, 이윽고 고양이 귀 머리띠도 느릿느릿 네게 씌웠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귀, 그 두 가지가 무척 잘 어울려 웃음을 짓는다.) 우리 둘 다 이렇게 다니자. 귀여워.
위림:(희고 둥그런 귀에, 둥근 눈매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귀엽다.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샌다.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춘다.) 이러니까 커플 티나서 좋다. 결제하고 올게.
(매대 근처에 있던 직원에게 가 머리띠 두 개를 사고… 그 김에 그 옆에 있던 고양이 풍선까지 하나 산다. 네 곁으로 돌아와서는 손목에 풍선 끈을 묶어준다.) 필수거든, 이거.
양사비의:(내가 하려고 했는데, 말릴 새도 없이 멀어진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변을 둘러본다. 저쪽은 가족끼리 온 것 같아, 저쪽은 친구들끼리 온 것 같고. 저쪽은…… 우리처럼 커플이 왔구나. 이렇게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자니 그냥 괜히 수줍어진다.)
(멍하니 있다보면 어느새 네가 다시금 내게 오고, 손목에는 가느다란 끈이 감겼다. 하늘 위로 둥실둥실 떠오르는 풍선을 보며 눈이 조금 커졌다.) ……귀여워.
이것도 너 닮았어.
위림:내 거라는 티도 내고 나중에 보면서 내 생각 하라고 일부러 고양이로 샀어. 맘에 들어?
양사비의:응. 아주 많이.
(너랑 이렇게 있다보면 웃음을 짓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나도 너한테 뭐라도 사주고 싶은데, 뭘 해주면 좋지... 음료나 아이스크림은 내가 살게.
위림:(풍선 하나 매단 것뿐인데, 내 거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하하, 알았어. 이제 가자, 곰돌이 여자친구. (다시 손깍지를 끼고 걷는다.)
양사비의:바보에다가 곰돌이라니……
바보야 그렇다 치는데, 곰돌이는 나한테 붙이기에 너무 귀엽지 않아? (그런 소리를 하면서 따라 걷는다.)
위림:귀여운 것만 덕지덕지 붙었네. (짓궂게 웃는다.) 곰돌이보다 네가 몇 배는 더 귀여워. 리본까지 달아서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곰돌이로 만들기 전에 나는 곰돌이 여자친구구나… 해.
양사비의:……
(나…… 과하게 좋아함을 받고 있구나. 그런데 이 깨달음이 부담스러워서 거북하다기보다는 고맙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말을 삼키는 동안 생각이 줄줄이 이어졌다.) ……이상한 질문 하나 해도 돼?
위림:(그러고 보니, 정말 귀엽긴 하겠다. 목에 커다란 리본을 맨 너는…. 실없는 상상을 한다.) 뭔데?
양사비의:내...
어떤 점이...
귀여워?
아니, 그러니까. (첨언할 필요를 느껴서 뒤늦게 덧붙인다.) 어떤 지점을 귀여워하는지 알면, 나도... 너랑 연애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
위림:(……'귀여운 지점'을 알면 그걸 바탕으로 내가 귀여워할 법한 걸 해주려고 하나?)
(어떡하지? 우직하게 물어보는 게 이마저도 귀엽다……)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일단… 좀 멍하고 둥글둥글하게 생긴 것도 귀엽고, 연애에 서투른 것도 좋고 귀여워.
안 그럴 것처럼 생겨서는 당황도 하고 부끄럼도 타고, 좋아하면 얼굴에 좋아하는 티가 나는 게 귀여워.
하도 올곧은 쑥맥이라 조금 짓궂게 장난치면 수줍어하는 것도 귀엽고, 그와중에 나한테서 이것저것 배워서 써먹고 욕심내는 게… (얼굴이 미미하게 상기됐다는 걸 깨닫는다.)
귀여워…… (말끝을 흐린다.)
양사비의:……
(단어들이 흘러나올 수록, 단어가 문장이 될 수록, 그리고 그 문장들이 길게 이어질 수록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른다. 누군가가 머리에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밑으로 푹 꺼지기도 했다.)
(마지막 말맺음이 끝나면 거진 홍당무가 된다. 그게 아니라면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라서 정수리로 김이 폴폴 솟아오르는 듯도 했고.)
고, 고마워. ...
귀여워해줘서......
위림:…… (자기가 물어봐놓고 쑥스럼타는 이런 점도 귀여워, 이 바보 곰돌이 여자친구야. 너를 향한 애정이 넘친 나머지 마음 밖으로 줄줄 새버려서 널 품에 껴안고 머리를 마구 헝클이고 싶어진다.)
(그래도 참아야지, 못 참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손끝만 몇 번 움찔거리고 머뭇거리다가 만다. 대신 마른세수를 했다.)
……빠, 빨리 가자. 나도 목 마른 것 같아. (네게 너무 많은 말을 해버려서 부끄럽다. 아이스크림 가게 방향으로 서둘러 걷는다.)
양사비의:…… (고개만 두어번 끄덕거렸다. 나 왜 이렇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있을까. 내가 뭐라고,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나 된다고 네 사랑을…… 까지 생각했다가, 이런 사고방식은 네 애정을 배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사고를 멈춘다. 나는 네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
(얼굴의 열기를 식히면서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더위 탓인지, 부끄럼 탓인지, 더운 얼굴을 식히며 걷다보면 어느새 아이스크림 가게 앞입니다.
가게 앞에 놓인 얼음 가득한 매대에선 시원한 음료수도 팔고 있네요.
놀이공원에선 사실 간식을 파는 노점도 명소지만, 심지어 여기는 터키 아이스크림입니다!
그간 봐 온 터키 아이스크림 점원의 손놀림을 생각해보면, 쉽게 잊을 수는 없는 손맛과 맛입니다….
위림:(괜히 더운 척을 하며 얼굴 앞에 부채질을 했다.) 뭐 먹을래? 음료수도 있고, 아이스크림도 있고……
양사비의:음, 아이스 커피 하나랑…… (아이 손님 하나와 점원의 터키 아이스크림을 사이에 둔 실랑이를 본다.)
저것도 하나 먹을까?
위림:아이스 커피 하나랑. (얼음 틈에 박혀있는 아이스 커피 한 병을 집어들고, '저것'이라는 말에 점원을 본다. 그 앞에서 애쓰고 있는 아이도.) 그럴까? 저것도 꽤 오기 생겨서 재밌단 말이지.
양사비의:먹어본 적 있어? (눈을 깜박거린다.)
위림:예전에, 친구들이랑 여기 놀러왔을 때. 그때도 저 점원이 얼마나 놀렸는지 몰라. 매대 엎을 뻔했다니까.
양사비의:(가볍게 바람 새듯 웃었다.) 맛은 어땠어. 놀림당한 보람은 있었어?
위림:먹고 나니까 딱히 놀림당한 기억은 안 나더라고. 그때도 날이 더웠는데 시원한 거 먹어서 그랬던 건지….
재미삼아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아. 어디 가서 이런 거 해보겠어.
양사비의:(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것도 다 경험이니까. 터키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한 줄에 서서 제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와! 드디어 잡았다!" 환호하는 아이 손님이 즐거워하며 옆으로 빠지면, 곧바로 당신의 차례입니다.
다가서자 외국인 점원이 인상 좋게 웃어 보입니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2천원입니다─라고 몹시 정확한 발음으로 우리말을 구사하는 게 베테랑입니다.
그말인 즉… 이 점원, 보통내기가 아닐 것 같습니다·····.
점원: 아이스크림, 하나 드릴까요?
양사비의:네, 하나 주세요. (어쩐지 비장함이 차오른다...)
위림:(옆에 서서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꽤 민첩하니까 한 번에 잡을 수 있을지도…)
점원이 커다란 봉처럼 보이는 스쿱으로 아이스크림을 콘 위에 퍼담고, 곧 현란한 동작이 이어집니다.
비장한 당신의 눈빛과 달리 점원은 넉살 좋게 웃고 있으나, 오히려 그래서 쉽게 줄 것 같지 않습니다…
질 수 없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받아봅시다!
비의, 민첩 판정!
양사비의:
민첩
기준치: 70/35/14
굴림: 65
판정결과: 보통 성공
날쌘 동작으로 낚아채버렸…나?
콘이 손 안에 있긴 하지만, 아이스크림이 담기지 않은 빈 콘입니다.
아뿔싸, 싶은 새에 점원이 호탕하게 웃으며 의외로 순순히 아이스크림이 담긴 콘을 내어줍니다.
양사비의:……
(얌전히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점원: 오늘 한 번에 이렇게 잡은 손님은 처음이네요! 하하, 얼마 못 놀릴 것 같은 손님은 빨리 보내드려야지.
어쩐지 얄밉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 더 얹어줍니다. 인심은 후하네요.
양사비의:아, (기분이 미묘했는데, 이렇게 한 스쿱까지 더 받으니 그 미묘함이 사르르 녹아버린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아이스크림을 받아서, 돌아서자마자 네게 내민다.) 자, 너 먼저 먹어.
위림:(그 모습을 전부 바라보다가, 네가 돌아오면 가볍게 박수를 쳐 맞이했다.) 역시 금방 잡을 줄 알았어. 허둥거리는 것도 귀엽긴 했겠지만…
(제 앞에 내밀어진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다. 입 안에서 시원한 게 녹으니 기분이 좋다.) 역시 열받아도 먹게 된다니까.
양사비의:봐주셔서 겨우 받아왔어. 그거 아니었으면 나도 한참 바보짓 했을 걸?
(네가 한입을 먹으면 저 역시 딱 한입만 가볍게 베어물어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달다. 시원하다. 기분좋은 맛이었다.) 이거 나머지는 너 다 먹어. 나는 커피 마시면 되니까.
위림:에이, 반씩 나눠서 먹자. 커피는 아무때나 마실 수 있잖아. 터키 아이스크림은 잘 안 판단 말야. (한 입 더 먹으라는 듯 바라본다.)
양사비의:…… (그 말이 끝나면 잠깐 머뭇이다가, 네 입술이 닿았던 곳을 한번 더 앙 깨물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간접적인 입맞춤이다.)
자. (시린 입안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이제 너 먹어.
위림:(능청스럽게 이전에 네가 베어문 곳을 깨문다. 반이 되게끔.) 같이 먹어서 그런가, 전에 와서 먹었을 때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아.
양사비의:(네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커피를 마신다. 이것도 카페인이라고 흐렸던 정신이 서서히 깨는 기분이 들었다.) 너 자꾸 그런 소리 하면 내가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
...... (부러 묵음처리했다.) 한다?
위림:(가만히 쳐다본다.) 해줘.
양사비의:……
(누가 볼 새라, 후다닥 입술에 쪽.)
위림:(입술이 닿자 웃음이 샌다. 한 손으로 네 뒷목을 감싸쥔다.) 한 번 더 해줘.
양사비의:... (시선을 이리저리 둘러보려고 하지만, 네 손이 제 뒷목을 받치고 있어 주변을 살피는 게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더, 서둘러서 입술을 포갰다.)
위림:(두 번째 입맞춤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대로 품에 가볍게 안는다.) 남들 다 보는데서 뽀뽀해서 부끄러워?
양사비의:넌, 안 부끄러워? (조그맣게 속삭인다.)
우리 아직 고등학생이고, 사귄 지도 얼마 안돼서 조금, 부끄러운가봐.
위림:응. 너랑 하는 건데 뭐가 부끄러워. 그리고 어쩌다가 보더라도 커플이 애정표현 하는구나… 하고 마니까. (말을 마치자마자 뺨에 가볍게 쪽, 하고 떨어진다.)
양사비의:…… (네가 제게서 떨어지면 그대로 커피를 꿀꺽꿀꺽 마셔버린다.)
위림:(이런 점이 귀엽다는 건데. 웃으면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는다.)
양사비의:(그런 일에 카페인까지 더해지니 심장소리가 콩콩 귓가를 때렸다. 때마침 봄바람이 불어와 열기를 식히며 묻는다.) 이, 이거 다 먹고는 어디 갈 거야? 롤러코스터 타러갈까?
위림:(더워서 빨개진 건지, 부끄러워서 빨개진 건지…. 달아오른 네 얼굴을 마냥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잘게 끄덕인다.) 그럴까? 줄 길어지기 전에 빨리 타야지. 커피는 다 마셨어?
양사비의:아까 전에 다 마셔서 나는 바로 일어나도 괜찮아.
이제 커피 마셔서 잠도 어느정도 깼고.
위림:(반쯤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먹어 없애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가자, 그럼. 그나저나… 무서운 거 잘 타?
양사비의:못 타지는 않아. 고소공포가 있는 건 아니니까. 아...마도? (확신은 못하겠다. 롤러코스터를 아주 어렸을 때에나 타봤으니 말이다.)
위림:타러가는 길이 안 무서우면 된 거야. (이제는 너와 깍지를 끼는게 습관이 됐다. 걸음을 맞춰 걸으며 롤러코스터 쪽으로 간다.) 재밌어하면 좋겠네.
양사비의:(제 손목에 감겨서 둥실둥실, 하늘을 걷는 고양이 풍선을 바라보다가 다시 너를 본다. 귀여운 고양이가 이렇게 나란히 있으니 숨만 쉬어도 행복감이 차오른다.) 너는, 롤러코스터 좋아하지? 안 물어도 그럴 것 같아.
위림:(군말없이 풍선을 매고 다니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기만 하다. 네가 널 이렇게나 좋아한다는 걸 다시 상기하게 된다.) 당연하지. 높은 데에서 훅 떨어져서 철렁하는 느낌도 좋아. 스릴 넘치잖아. 근데 이런 얘기 하면 꼭 이해 못하는 사람들 있더라.
양사비의:놀이공원에서 딱 한가지 놀이기구만 탈 수 있으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롤러코스터야?
위림:누구랑 타느냐에 따라 다른데. (가만 바라본다.) 너랑 같이 타는 거야?
양사비의:흠, 글쎄. 그렇지 않을까?
위림:그럼 관람차 탈래.
양사비의:……
잠깐, 딱 거기까지만 얘기해. 나 오늘 얼굴에 열 많이 올라서 또 오르면 터질지 몰라.
위림:흠, 왜 관람차냐면… (네 말을 못 들은 셈 치고 마저 말을 이으려 한다. 의도가 분명한 장난이다.)
양사비의:…… (제 귀를 막으려고 하지만, 한쪽 손이 잡힌 상태에서 귀를 막아봤자 다른 한쪽은 훤히 뚫려있을 뿐이다.)
(그래서 네 입을 턱 하고 막아버렸다.)
위림:(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뜬다. 곧 눈을 접어 웃으며 입을 막은 손등에 글씨를 쓴다. 안 할게.)
양사비의:(그제서야 스르르 입막은 손을 내린다.) ...
바보. ...
위림:바보는 너잖아. 이런 거에도 부끄러워하고… (귀엽게. 뒷말은 삼켰지만 시선에서 묻어난다.)
양사비의:나 놀리는 게 재밌는 거지, 그치? (어떻게 해야 무던해질 수 있을까, 이미 네게 애정을 느낀 순간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무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민을 한다.)
위림:놀리는 게 재밌는 것보다는 네가 부끄럽고 쑥스러워하는 게 좋은 거야. 나 좋아하는 것 같고 귀엽고……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슬쩍 사선으로 향했다가 돌아온다.) 그러니까 봐 줄 거지?
양사비의:…… (손깍지 사이사이로 힘을 꽉 준다.) 그렇게 얘기하면 내가 거기에 뭐라고 그래. 치사하게. ...
위림:(손등을 가볍게 문지른다.) 치사한 남자친구는 싫어?
양사비의:이런 걸 물어보는 것도 치사해. 당연히 좋아한다는 대답이 돌아갈 것도 알잖아.
위림:아니까 물어보는 거야. 좋아한다는 거 듣고 싶어서.
양사비의:치사해도 좋아. 좋아하는 걸 아니까 치사해.
위림:(아, 또 넘칠 것 같다. 적당히 좋아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겠다.)
바보 여자친구…… (참다 못해 결국 뺨에 입 맞춘다.) 이러니까 자꾸 좋아하게 되잖아…
양사비의:…… (롤러코스터로 향하는 길목에서,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든다. 걸음걸이에 맞춰서 포물선으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자꾸 좋아하게 되면, 자꾸 좋아해주면 되지. ...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계속 계속 좋아해주면 나도 좋고, 너도 좋고... ...
위림:이런 얘기 하니까 자꾸 바보라고 그러는 거야. (어쩐지 낯뜨거워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괜한 소리나 했다.) 그러다가 진짜 하루종일 너만 좋아하게 된다고. 지금도 네 생각밖에 안 하는데…… (또 시선이 사선으로 비낀다.)
양사비의:(입술을 꼭 다문다. 목끝까지 부끄러움이 차올라서 좋아한다는 소리만 넘쳐흐를 것 같더랬다.)
(손을 꼭 잡은 채로 롤러코스터 줄이 길게 늘어선 곳으로 걸어간다. 별다른 말은 없다. 이미 맞잡은 손으로 두근거림이 차고 넘치게 전달되고 있었으니...)
위림:(뺨이 상기된 게 느껴져서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돌린 채다. 게다가 얇은 손바닥 피부 너머에서 고동마저도 느껴져, 온통 간질간질한 기분 탓에 차마 입을 열 수가 없다.) ……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과 사람들의 시끄러운 대화 소리를 대신 말소리로 삼다가, 일부러 외딴 얘기를 꺼냈다.) …줄, 금방 줄어들 거야. 오래 기다리진 않더라고. 항상……
양사비의:응, (짤막하게 대답한 뒤 이윽고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노약자, 임산부, 이외에도 심약 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탑승을 제한하며……. 어린아이 역시 키제한을 두고 있다는 말에 괜히 너를 쳐다본다.)
(여기는 키만 큰 어린 애인데,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시덥잖은 생각이 이어진다.)
위림:(어린아이 역시 안전을 위해 키 제한이 있으며─하는 안내방송이 지나간다. 동시에 옆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말없이 고개를 슬쩍 돌려 흘끔 쳐다본다.) ……
날 왜 봐. 방송에선 어린이 얘기하는데.
양사비의:.......
아, 아니야, 아무것도. (어색하게 고개를 앞으로 돌린다.)
위림:(네 고개가 앞으로 향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완전히 네게로 향한다. 그대로 빤히… 쳐다본다.) 진짜?
양사비의:……키 큰 어린이. (결국 툭 내뱉는다.)
위림:……
좋겠다, 연하남이랑 연애하네.
양사비의:연하가 너무 연하라서 누가 흉보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
몹쓸인간이라고. (지지않는다...)
위림:(나참, 이런 걸로도 안 지려고 하고……)
(문제는 그마저도 귀여워 보이고, 나도 질 생각이 없다는 거다.) 나중에 결혼식에서 신랑이 많이 어리네요, 소리 들으면 '저 대학 가서 공부할 때 신랑은 수학익힘책 풀었더라고요'라고 해.
양사비의:...너 진짜 유치해. 알아?
참나, 신랑 수능치고 대학갈 때까지 내조 잘 할거라고도 얘기할게. 결혼식장에서.
위림:유치한 건 너잖아. 난 어린이 값 하고 있는 거고. (볼 쿡쿡 찌른다.)
꼭 그렇게 얘기해. 감시할 거야. (그 손 그대로 옮겨 네 머리를 마구 헝클인다.)
양사비의:......림! (두어박자 늦게 이름을 부른다. 때마침 줄이 우르르 앞으로 빠져서 따라 걸음을 옮기며 머리카락을 정돈한다.)
나도 네 머리 엉망으로 만들 거야. 또 그러면. (꿍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림:(같이 걸음을 옮기며 잘게 소리내어 웃다가, 머리띠 아래로 엉킨 머리카락을 본다.) 삐지지 마. (머리띠를 슬쩍 빼내 한 손으로 마저 꼼꼼하게 정리해주고, 곰돌이 귀 머리띠까지 마저 씌워준다. 이제는 가볍게 쓰담는 손길이다.) 이제 봐 줄 거지?
양사비의:(네 손길이 닿을때마다 묘하게 삐죽 솟았던 감정이 차차 누그러지는 게 느껴진다. 바보같을 정도로 사르르.) ...
(그렇게 투닥대다 보니 어느새 길었던 줄에서 제법 앞쪽까지 다다랐다. 떨어지는 구간에서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두어번 정도 지나가면 곧 너와 나의 차례가 올 것 같다.) 딱 이번까지만 봐주는 거야.
그나저나 롤러코스터에서 앉고 싶은 자리... 있어? 맨 앞?
위림:그래, 그래. (저렇게 말해도 매번 봐주겠지. 안 봐도 뻔하고 사랑스럽다. 애정이 묻어나는 손길로 아까 손가락으로 찔렀던 자리를 문질러준다.) 롤러코스터는 맨 앞자리지. 그치만 너 무서울 것 같으면 몇 칸 뒤로 가도 돼.
양사비의:(네 손길이 있는 곳으로 고개가 점점 기울어진다.) 아냐, 나도 맨 앞 좋아.
맨 앞 타보고, 너무 무서우면 다음에는 다른 자리에서 타면 되지.
위림:(아예 손바닥으로 뺨을 완전히 감싸버린다.) 한 번 더 타게? 아니면 나랑 또 오게.
양사비의:(양뺨이 눌려서 살짝 붕어입이 된다.) 당연히 너랑 또 와야지.
데이트 하다 보면 또 오는 일 생길 거 아니야.
위림:(그대로 살짝 튀어나온 입술에 쪽, 입 맞춘다.) 그럼. 또 오는 일 많지. 나중엔 바이킹도 타보자.
양사비의:(사람들... 봤을 것 같은데. 아니나다를까 너와 날 바라보다가 급하게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얼굴이 좀 붉어진다.) ... ...바이킹이 더 무서워, 롤러코스터가 더 무서워?
위림:(우리쪽을 바라보다가 급히 시선을 피하는 사람들을 눈치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도 않고 한 번 더 입 맞춘 뒤에야 뺨을 놔줬다.) 난 둘 다 재밌게 타서…. 흠, 둘이 무서운 느낌이 좀 다른데. 바이킹은 좀 철렁철렁, 하는 느낌이 있으니까 떨어지는 거 무서우면 바이킹이 좀 더 무섭겠다. (롤러코스터가 레일을 달리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리다가 순식간에 멀어진다.)
양사비의:자, 잠깐만... 사람들 보잖아... (입맞춤과 네 말이 끝나면 누가 들을 새라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인다.)
위림:뭐 어때. 원래 놀이공원 오는 커플은 다 그런 거야. 사람들도 대충 다 감안하고 있을걸? 아, 저 커플도 세상에 서로밖에 없구나… 하고.
양사비의:그... 그런 거야? 그래도 공공장소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면 우리 두 사람 앞으로 서있던 줄이 전부 사라진다. 다음 차례에 탈 수 있는 모양이다.)
위림:줄 기다리는 커플이 기다리면서 할 수 있는게 애정표현 말고 또 뭐가 있어. 게다가 데이트 온 건데.
(몸을 살짝 숙여 소근거린다.) 뻔뻔해져도 돼. 뽀뽀하고 싶으면 뽀뽀하고, 기대고 싶으면 기대고.
양사비의:난 아직 연애초보라서 뻔뻔해지는 건 좀 나중에 뻔뻔해질래. 부끄럽단 말이야... (그런 소리를 뱉고는 두 사람의 입장 차례를 기다린다.)
위림:서툴러서 귀엽긴 해. (빙글 웃고는 그대로 어깨에 툭 기댄다.)
덜컹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롤러코스터가 탑승구로 돌아옵니다.
역시 롤러코스터라 그런 건지, 들뜬 사람도 보이지만 반면 초췌해진 채로 돌아온 사람도 있네요.
직원이 승객을 출구로 안내하고, 곧 우리를 롤러코스터에 탑승시킵니다.
담력만 갖추고 있다면, 이만한 재미와 스릴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없죠!
직원은 발랄한 멘트와 함께 안전벨트와 몸을 잡아주는 안전장치를 고정시킵니다.
마지막으로 확인을 마치고 나면, 롤러코스터가 출발합니다.
방금 막 내려서 출구로 향하던 승객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면 착각입니다······.
레일을 따라 꽤 까마득하게 올라가는데도 위림은 신난 얼굴입니다.
정상에 다다르고 얼마 뒤, 떨어질 듯 간당간당하게 애태우던 롤러코스터는…
쏜살같이 낙하하자마자 그 속도 그대로 한 바퀴를 크게 돕니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한 바퀴 더 돌고, 속도가 조금 느려져서 이제 숨 좀 돌릴 수 있나 싶던 때에…
다시 꼭대기로 올라가더니 팍 떨어집니다.
사방에서 시끄러운 비명소리가 먹먹하게 울립니다.
빠른 속도로 레일을 따라 내달리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돌고 빠르게 낙하한 뒤에야 승강장에 도착합니다.
3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까지 길게 느껴진 적은 처음입니다.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은 엉망입니다.
이리 떨어지고, 저리 돌고… 속은 괜찮나요?
좌석에서 일어나며 한 번 확인해 봅시다!
비의, 건강 판정!
양사비의:
건강
기준치: 80/40/16
굴림: 3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괜찮네요! 오히려 재밌게 즐긴 것 같아 즐겁기만 합니다.
이런 롤러코스터 하나에 흐트러질 담력이 아니죠.
양사비의:(산발이 된 머리카락으로 고개를 든다.) ... ...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위림이도 재밌게 탔나?)
위림:아~ 재밌었다. (마찬가지로 머리가 산발이다. 높게 묶었던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다. 그래도 즐거워서 마냥 웃기만 한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마주한다.) 어때, 재밌었어?
양사비의:(롤러코스터는 나쁘지 않았고, ─주변이 시끄러워서 머리가 웅웅대고, 하도 흔들려서 목이 아팠지만─ 네가 웃는 모습을 보자니 따라서 웃게 된다. 그래서 대답이 바로 나올 수 있었다.) 응. 재밌었어.
맨 앞자리도 별로 안 무섭네. 오히려 다른 자리들보다 나은 것 같아. 언제 떨어질지 알 수 있으니까. (안전바가 위로 올라가면 비틀거리는 것도 없이 코스터에서 내린다.)
위림:다행이다. 혹시라도 무서워할까봐 걱정했거든. 여기 롤러코스터가 다른 놀이공원보다 무섭다고 하더라고. (뒤따라 멀쩡한 걸음으로 롤러코스터에서 내린다. 네 손을 잡고 출구 쪽으로 향하다가, 조금 넓은 공간이 나오면 멈춰선다.)
우리 둘 다 머리 산발이겠다. (이번엔 바람이 헝클인 네 머리를 꼼꼼하게 정리해준다.)
양사비의:저기, 저쪽에 잠깐 앉아있자. (롤러코스터 출구 바로 근처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머리 다시 묶어줄게. 지금 나보다 네 머리가 더 난리일걸.
위림:아, 그럴까? (네가 가리킨 벤치로 가 앉는다. 네 머리를 마저 정돈해 준 뒤에야 묶어달라는 듯 얌전히 있는다.) 처음이야, 누가 머리 묶어주는 거.
양사비의:어, 정말? (아예 머리끈을 풀어버리고, 손가락을 빗으로 삼아 네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어내린다. 엉키는 것이 잘 없으니 정돈되는 것도 빨랐다.) 어렸을 때에는 누가 안 묶어줬어?
위림:기억 안 나. 묶어줬는지, 어땠는지.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손길이 좋다. 저절로 눈이 감긴다.) 내가 기억하는 내에서는 묶어준 사람 없어.
양사비의:다들 매몰차네, 머리카락이 이렇게 부드러운데. (잔잔히 답하고는 가라앉아 얌전해진 머리카락을 빠지는 것 없이 꼼꼼하게 감싸쥔다. 머리끈으로 타래를 단단하게 묶었다.)
자, 됐다. 처음으로 누가 머리 묶어준 기분은 어때?
위림:(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만져주는 거라 더 마음이 편해진다. 남이 머리 만져주면 기분 좋다더니, 진짜구나…. 온통 너한테 맡긴 채 나른한 기분을 즐기다가, 질문이 들려오면 그제야 눈을 떴다. 한 박자 늦게 대답한다.) 기분 좋아. 나른하고…… 졸릴 때 이렇게 만져주면 금방 잘 수 있을 것 같아.
양사비의:자면 안 돼. 나랑 데이트 해야하니까. (뒤에서 몸을 한껏 네게 붙여…… 후다닥 뺨에 입을 맞추고 떨어진다. 연애 초보의 뻔뻔해지기 첫번째 시도다.)
위림:(뺨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이 무얼까, 잠깐 생각했다. 입술인 걸 깨닫자마자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간다.) ……
(동시에 짓궂은 마음이 든다. 살짝 뒤돌아 바라본다.) 한 번만 더 해주면 안 돼? 그럼 잠 깰 것 같은데.
양사비의:……안 해주면? 여기서, 잘 거야?
위림:응. 네 무릎 베고 잘래. (거짓말이다.)
양사비의:…… (귀 바로 옆 피부에 후다닥 입술을 가져다 붙인다. 뽀뽀라기 보다는 귓속말하는 모양새에 가까웠지만, 일단 입술이 닿았으니 뽀뽀다.)
위림:(뽀뽀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접촉이더라도 마냥 기쁘다. 짧게 웃고는 멀어지기 전에 따라가서 입술에 입 맞춘다.)
이제 고양이 인형 따러 가자. 매일 내 생각 할 거 하나는 있어야지.
양사비의:(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 윗쪽으로 홀라당 고양이 귀 머리띠를 씌웠다.)
좋아. 미니림 만나러 가야지. (벌써 별명도 생각해뒀다.)
위림:(어느새 너와 깍지를 낀 채다. 사격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벌써 이름까지 정한 거야? 까만 고양이 아니면 어쩌려고.
양사비의:그럼... 새 이름은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지.
뭐가 좋으려나, 사이즈가 크면 대길이라고 짓고, 사이즈가 작으면 소길이라고 지을래.
위림:놀이공원 이름 딴 거야? (흰 고양이면 하얀림, 삼색이 고양이면 삼색림, 정도로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하얀색 곰인형은 분명 있을 테니까 그거 따게 되면 나도 너 따라서 미니비의로 할래.
양사비의:어떻게 확신해? 하얀 곰돌이 대신에 갈색 곰이라든가, 팬더가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렇지만 미니-비의가 네 침실에 들어가 하루종일 생활하는 네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하얀 곰이 있었으면 좋겠다.)
위림:갈색 곰이면 갈색비의고, 팬더면 팬더비의 해야지. (좀전에 막 했던 생각이랑 똑같은 실없는 대답이다.) 그치만 보통 흰색 곰인형은 없을 리가 없거든,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난 이미 침대맡에 두고 껴안으면서 잘 계획까지 다 세웠어.
양사비의:…… (가볍게 웃었다.) 껴안고 자줄 거야?
네가 옆에서 총 쏘는 거 보고만 있을 생각이었는데, 나도 해야겠네. 너한테 비의 인형 안겨주고 싶어.
위림:응, 매일 껴안고 잘 거야. (마주 웃는다.) 내가 곰인형까지 다 딸 생각이었는데, 네가 따주면 더 좋지. 네가 준 거니까 진짜 너 껴안고 자는 기분일 것 같아.
양사비의:(눈앞에 사격장이 보인다. 네가 돈을 내고 총을 들기 전에, 잡은 손을 뿌리치고 네게 몸을 잔뜩 밀착했다. 품에 한껏 끌어안고 떨어진다.)
됐다. 사기충전.
열심히 해서 꼭 인형 따줘야지. ...
위림:(순식간에 와락 안겨오자 당황해서 어정쩡하게 안아주고 있다가, 네가 떨어지면 또 어정쩡하게 손을 거둔다. 눈만 깜빡이고 있다 보면 곧 포옹의 의미를 알게 된다. 웃음이 터졌다.) 충전했으니까 꼭 따주는 거야.
점원: 어서오세요! 사격 해보시겠어요?
양사비의:네. 둘 다 할 생각인데 한 번 도전하는데 얼마인가요?
점원: 다섯 발 쏘실 수 있고 회당 3천원입니다!
위림:(쏜살같이 두 명 분을 계산하고 능청스럽게 총을 든다.) 누가 먼저 할래?
양사비의:……
(계산 뺏긴 거야 그렇다 치고, 솔직히 말하면... 조금 쫄린다.) 너 먼저 해. 나 네가 하는 거 보고난 다음에 할래.
위림:(고개를 끄덕이고는 사격장 내부를 살펴본다. 어디, 곰 인형이랑 고양이 인형이 있나……)
사격장은 코르크 탄을 끼운 총으로 과녁을 맞히는 게임입니다.
다섯개의 과녁이 있고, 그중에서 네 번 이상을 명중한다면 인형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 외의 점수는 열쇠고리를 주네요.
마침 인형 중에 하얀색 곰 인형과 검은색 고양이 인형이 있습니다! 그것도 꽤 큰 사이즈로요.
저 정도 크기면 둘 다 충분히 껴안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림:(꽤 멋진 폼으로 총을 잡고 섰다.) 이정도면 완전 할만하지.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1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57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7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98
판정결과: 대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1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점원: 앗, 아쉬워라! 세 번 맞추셨으니까 경품은 열쇠고리네요. 고양이랑 곰돌이랑 강아지 있는데 어떤 걸로 드릴까요?
위림:…… (심란한 얼굴로 점원을 한 번, 과녁을 한 번, 마지막으로 비의를 한 번 본다. 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른세수를 한다.) 곰돌이로 주세요……
양사비의:…… (보통 어려운 게 아니구나... 긴장한다...)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고, 조준은 살짝 윗쪽으로 하고... ...)
점원: (카운터 아래쪽에서 흰 곰돌이 열쇠고리를 꺼내 건넨다.) 하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또 도전하시면 되니까!
앗, 이제 여자친구 분 도전하시려나봐요.
위림:(비의 뒤에서 과녁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눈치껏 맞아라… 라는 되도 않는 협박을 하면서.)
양사비의:…… (떨린다. 해본 적이 있어야 호언장담이라도 하지. 잔뜩 충전한 남자친구의 힘을 끌어내서 도전해본다.)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49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80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2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60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5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양사비의:……
…….
…….
고, 양이로……
주세요.
위림:(점원한테 가 실없는 소리를 했다.) 아니, 이거 명중률 이상한데 조작한 거 아니에요?
점원: (비의에게는 고양이 열쇠고리를 건네주고, 열심히 손사레를 친다.) 에이, 그럴 리가요~! 저희는 그런 거 안 해요.
위림:(점원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도로 평소의 가벼운 얼굴로 비의를 본다.) 어떡할래, 한 번 다시 해볼까?
양사비의:(끄덕거린다.)
한 번만... 다시 해보면 안돼?
위림:딸 때까지 해도 돼. (시시덕거리고는 다시 계산한다.)
이번엔 네가 먼저 해.
양사비의:(비장한 각오로 임한다. 이번에는 꼭 따고 싶은데...)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65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98
판정결과: 대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78
판정결과: 실패
양사비의:……
난, 나는…… 열쇠고리로 만족하는 것 같아. 아, 고, 고양이로 주세요. 네, 네, 이번에도...
위림:(네가 점원한테서 열쇠고리를 받아오자 제 총을 건넨다.) 내 것까지 다시 한 번 해 보면 안 돼? 잡는 법 알려줄게.
네가 딴 곰인형 받고 싶어. (어쩐지 비장한 얼굴이다.)
양사비의:...내가 두 발 쏠테니까 네가 세 발 쏘면 안돼? (자신감이 하락한 얼굴이다...)
위림:일단 와 봐. 총 잡고. 할 수 있다니까.
양사비의:……
(엉거주춤 총을 잡는다.)
두 발만 쏜다? 나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위림:알았어, 알았어. 이쪽 손은 여기에 두고. 어깨는 좀 더 내리고… (네 뒤에 서서 네 손을 잡고 자세를 조금씩 바꿔준다. 이전에 포옹으로 충전했던 것처럼 똑같이 뒤에서 껴안아준다.) 충전까지 다 했어.
양사비의:…… (잠깐, 잠깐만. 이게 뭐야. 이 민망하고 낯간지럽고 누가 봐도 사귀는 것 같고…… 딱 붙어버린 자세가 낯뜨거웠다. 괜히 말라붙는 것 같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넣어 적시고, 침을 삼킨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자기암시를 연신 반복한다.)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61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두, 발…… 쐈어. 나머지 네가 할 거야?
위림:네가 마저 했으면 싶긴 한데…, 부담스러우면 내가 할게.
양사비의:아냐, 내가 마저 할게.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사격장 좀 다녀둘걸. 멋지게 인형 따주고 싶었는데...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96
판정결과: 대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2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아, 아깝다...)
(빈 방아쇠만 덜걱덜걱 당겨본다...)
위림:(한 발만 더 주시면 안되나요, 점원한테 가서 소근거리다가… 그냥 두 번 치를 또 결제하고 왔다.)
기다려봐, 나 이런 거 못 참아. (저번에도 이래서 인형뽑기에 몇 만원 쓰고 왔는데. 어쨌든 그건 땄으니까 된 거고, 이번 목표는 이번 목표다.)
(비장하게 자세를 잡고 쏜다.)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43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58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45
판정결과: 실패
위림: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
양사비의:……
위림:(총을 팽개치듯 둔다.) 이거 조작한 거 맞는 것 같다니까?
양사비의:그냥 될 때까지 해보고 열쇠고리도 한 번에 정산받을까? (...)
반 애들한테 나중에 나눠줘도 될 것 같은데...
점원: (듣고 있다가 멋쩍게 웃는다.) 하하, 편하게 하세요! 진행하시는 거 보면서 미리 꺼내두고 있을게요!
위림:그렇대. 마저 하자……
양사비의:……
위림:내 지갑이 이기나 과녁이 이기나 해보자고……
양사비의: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53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61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84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3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0/20/8
굴림: 47
판정결과: 실패
위림:(다시, 두 번치 결제하고 온다…) 이제 감 잡았지?
지금까진 연습 게임이었던 거야.
양사비의:당연하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사실 아무 거 맞다. 남자친구의 허세가 옮아왔다.)
위림:그럼, 그럼. 이제부터 진짜라니까. (비장하니까 더 안 맞는 것 같다. 허세 가득 여유 만만인 표정과 자세로 과녁을 겨눈다.)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82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59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91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1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위림:……
양사비의:(이어서 자세를 잡는다.)
위림:너, 너무 건성으로 해서 그래. 이건. (또 허세다.)
양사비의: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1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6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1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82
판정결과: 실패
아, 아.
양사비의:... ...!
점원: 어머! (방긋 웃으면서 박수를 친다.) 축하드려요~!
양사비의:……!
(살면서 이렇게 웃어본적이 없다 싶을 정도로 활짝 웃는다.)
하, 하얀 곰으로 주시겠어요? 저기 있는 커다란 거요. 네, 그거. (기뻐서 말도 더듬었다.)
위림:(경박하게 웃으면서 와락 끌어안는다.) 거봐, 연습게임 맞았다니까.
점원: (위쪽에 걸려있던 커다란 흰 곰인형을 꺼내와 비의에게 건넨다.) 해내실 줄 알았어요~ 두 분이서 너무 열심이셔서 저까지 응원하게 됐다니까요.
양사비의:이거 봐, 림아. (하얀 곰인형을 높이높이 들었다가 네게 안겨준다. 여전히 얼굴 위에는 웃음이 활짝이다.) 미니 비의.
위림:(네가 기뻐하니까 덩달아 자신까지 기뻐진다. 저렇게까지 환히 웃었던 적이 있었던가. 곰인형보다 밝게 웃는 네 얼굴에 더 시선이 간다. 웃는 얼굴을 자꾸만 보고 싶어져서.)
(품 안에 들어온 곰인형을 조심스레 만져본다. 오로지 네가 날 위해 시도하고 또 선물했다는 사실이 더없이 기뻐 웃음이 샌다.) 진짜 미니 비의네. 하얗고, 폭신하고, 부드럽고…
빨리 껴안고 자보고 싶다. 진짜 잠 잘 올 것 같아.
…그니까 나도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해보면 안 돼?
양사비의:좋아. 한 번 아니고 열 번 더 해도 괜찮아. 옆에서 기다리면 되지.
아, 대신에 이번에는... (재빨리 지갑을 열어서 가격을 계산한다.) 내가 낼래.
여태 계속 네가 냈으니까. 괜찮지?
위림:알았어. 네가 내주는 거니까 이번에 꼭 따야겠다. (사격대 위에 곰인형을 조심조심 올려둔다.)
양사비의:(뒤에서 껴안았다 놓는다.) 충전까지 끝.
위림:(좋아, 여자친구 기운까지 충전했으니까… 이번엔 될 것 같다!)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83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53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57
판정결과: 실패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3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1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양사비의:(후다닥 또 계산한다.)
무슨... 무슨 일 있었어?
아직 총 안 쐈잖아.
얼른 쏴.
위림:점원이랑 싸우고 싶다. (사격대에서 심란한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하다… 기 살려주는 것 같은 네 말에 도로 웃는다. 능청스럽게.) 그럼, 우리 이번이 처음이잖아.
(다시 자세를 잡는다.)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3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32
판정결과: 보통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2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3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위림:
사격(권총)
기준치: 45/22/9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하, 한 번에 인형까지 따버리고. 무서운 재능이다… (여전히 허세다.)
양사비의:(옆에서 웃는다. 네 말에 맞장구치면서 점원에게 저쪽에 놓인 검은 고양이 인형을 달라고 요청했다.)
위림:(후다닥 가서 점원이 주는 검은색 고양이 인형을 받는다. 활짝 웃는 얼굴로 네 품에 안겨준다.) 자, 미니 림.
양사비의:미니림.
(고양이 인형을 와락 끌어안아 인형의 푹신한 배 부근에 얼굴을 푹 묻는다.) 부드러워. ...
고마워, 림. 매일매일 끌어안고 잘게. (행복감에 웃어버린다.)
위림:(사격대 위에 올려뒀던 흰 곰인형을 조심히 품에 끌어안는다. 네가 인형을 안겨주던 얼굴을 생각하면 또 웃음이 난다.) 이제 우리 자기 전에 서로 생각할 수 있겠네.
양사비의:매일매일... 이 인형을 보면 오늘 생각을 할 것 같아.
오늘 얼마나 즐거웠는지, 새로운 경험은 또 얼마나 많이 했는지, 네가 얼마나 귀엽고 멋있었는지.
고마워,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위림:(네가 행복하단 말을 한 게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네가 바라는 게 생기면 좋겠어서, 원하는 게 생기면 좋겠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했던 모든 일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무가치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실제로 네가 행복해하는 모습에 마음 밖으로 감정이 샌다.)
(그래도 나오는 말이라고는 볼품없다.) 다행이다, 즐거웠던 것 같아서.
네가 행복하다니까 나도 행복해. 오늘이 제일 행복한 것 같아. 인형 따느라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벅찬 기분을 덜어내려고 일부러 가벼운 말만 꺼낸다.)
그래도 해피 엔딩이네, 그치?
양사비의:그래도, 가 아니라……
아니나다를까 해피 엔딩이야. (나는 이 열손가락에 주렁주렁 열쇠고리를 매달아도 좋아했을 것 같다. 그것은 확실하다. 너를 닮은 인형이 중요한 게 아니라 너와 보내는 시간이 중요했으므로.)
인형도 땄겠다 이제 다른 곳 가자. 뭐 남았더라, 관람차? (종알거리면서 점원으로부터 열쇠고리들이 가득찬 기념봉투도 받았다. 한 손에는 봉투, 한 팔에는 고양이 인형이다.)
위림:내 여자친구는 말도 예쁘게 하고… (한 손으로 곰인형을 안고, 남은 한 손으로 네 뺨을 가볍게 꼬집어 귀여워한다. 손을 떼고 그 자리에 가볍게 입 맞춘다.) 응, 이제 관람차 타러 가야지. 해도 많이 저물었으니까 지금 타러 가면 딱 예쁘겠다.
양사비의:하루가 왜 이렇게 후다닥 지나가는 기분일까, 아쉽게. (네 손길이 놓인 곳으로 뺨이 자연히 기울어진다. 입술이 닿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위림:둘이 있어서 그래. 즐겁고 행복하고 좋아서. (손을 내려 그대로 네 손과 깍지 껴 잡는다. 뉘엿 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루가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양사비의:다음에 오면 나 범퍼카도 타고 싶어. 후룸라이드도. (관람차가 놓인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고개를 흘금 돌려 하늘을 올려보는 네 얼굴을 보았다.)
위림:좋지. 오늘보다 더 한적할 것 같은 날로 잡아서 못 타본 거 다 타보자. (고개를 내리면 너와 시선이 마주친다. 버릇처럼 웃어 보인다.) 키링 말야, 침대 머리맡에 두면 귀엽겠다. 네가 바글바글 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양사비의:흠, 밤새 머리맡에서 널 쳐다보면서 좋아한다고 얘기할 것 같아. 키링이 된 미니 '미니 비의'는.
위림:(잠시 상상해본다. 동글동글 복실한 곰인형 키링이 밤새 좋아해, 좋아해, 하고 조잘거리는 모습을…) ……
바보같아. (귀엽다는 뜻이다.)
양사비의:(그 진의가 제게 바로 와닿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잠깐 정적이 사이에 끼인다.) ... ...바보같아?
위림:온종일 나만 보고 내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거잖아.
양사비의:아무래도 그렇지. 미니 '미니 비의'도 결국은 나랑 비슷할 거니까.
당장 네가 눈앞에 있으면 좋아한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잘 안 들 것 같아.
위림:그게 바보 아니면 뭐야. 귀엽게…… (뒷말은 거의 들릴 듯 말 듯 사그라든다.)
그럼 자고 일어나서 다 뽀뽀해줘야겠다.
양사비의:뽀뽀는 공평하게 해 줘야 해. 한 애한테만 하면 질투나서 다른 곰들은 삐질걸? (유치한 소리를 잔뜩 늘어놓는다.)
위림:자고 일어나서 제일 큰 '미니 비의'한테 먼저 해주고 그 다음에 '미니 미니 비의'한테 싹 다 해주면 되겠다.
그러고 나서 너 만났을 때엔 너한테 제일 많이 해주면 공평하지?
양사비의:(고개를 끄덕거린다.) 합리적이고 공평한 것 같아.
…… (그리고는 제 옆구리에 끼인 '미니 림'이 문득 떠오른다.) 나도 매일 아침마다 인형들한테 뽀뽀해 줘야지. ...
위림:(일어나자마자 인형에 입 맞추는 너를 상상한다. 어쩐지…) 인형한테 질투날 것 같아.
양사비의:결국에는 여기 있는 '림'한테 제일 많이 해 줄 건데도?
위림:어쨌든 걔도 너한테 뽀뽀받는 거잖아. (그래도 그렇지, 인형을 질투하는 건 너무 옹졸한 남자친구처럼 보일 것 같다. 뒤늦게 말을 덧붙인다.) 그래도 그 '미니 림'도 너한테 뽀뽀받는 거 좋아할 테니까 내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야지.
양사비의:(느릿하게 빙글빙글 돌아가는 관람차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 앞에 선 줄의 길이를 가늠하다가도, 네 목소리가 들리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림, 여기 봐봐.
위림:(우리 앞에 서있는 인파의 수를 재어보다가, 곧장 고개를 돌린다.) 응?
양사비의:(검은 고양이 인형을 들어 인파의 바깥쪽을 가렸다. 온 사방이 사람이라 이렇게 한 면만 막아서는 너와 나를 꼼꼼히 가릴 수 없지만, 인형이 가림막을 세워주는 동안 네 입술에 재빨리 뽀뽀한다.)
(이윽고는 멋쩍게 웃었다.) 너한테 뽀뽀하는 게 제일 좋다는 거 알지? 그냥, 모르면 알고 있으라고.
위림:(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무어라 말하려던 게 입맞춤 새에 다 먹혀버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다. 몇 번 벙긋거리다가 결국 웃어버리고 만다. 고개를 살짝 숙여 눈높이를 맞춘다.) 이래도 모르겠으니까 한 번 더 해줘.
양사비의:나머지는, 관람차에 타면. (속삭인다.)
인형 눈도 다 가려놓고 뽀뽀하자. 응?
위림:(언뜻 앞을 보니 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얼마 안 남았으니까 기다려주는 거야.
어느덧 해는 완연히 저물고, 하늘은 주홍빛과 보랏빛이 섞여가고 있습니다.
사이사이에 얼룩이 진 구름이 떠다니는 사이, 관람차는 느긋하게 돌아갑니다.
관람차에서 야경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은 건지, 줄에 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금방 우리 차례가 옵니다.
직원이 밝게 웃으며 맞이해주더니 관람차 문을 열어줍니다.
위림:(안으로 먼저 들어가 옆자리를 톡톡 두드린다.)
양사비의:(몸을 숙이고 내부로 들어간다. 마주 앉으려다가 네 손짓을 보고 네 옆에 털썩 앉는다. 맞은편에 인형을 둔다.)
위림:(너를 따라 맞은편에 곰인형을 내려둔다. 우리랑 똑같이 앉은 모양새가 된다.)
직원은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문을 닫아줍니다.
관람차는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창밖으로 시야는 점점 높아지며 사람들의 목소리도 까마득해집니다.
위림:(기다렸다는 듯 말없이 너를 가만히 바라본다. 바라는 게 명확한 눈이다.)
양사비의:(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사라지자마자 네게 답삭 안겨 입술을 포갠다.)
위림:(제게 안겨오는 몸을 품 안 가득 껴안고 마주 입 맞춘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면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비의야, 이번 방학 즐거웠어?
양사비의:……? (이런 질문이 올 거라고는 예상을 못했다. 잠깐 놀란 낯으로 널 바라보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히 즐거웠지. 그건 왜?
위림:난 꼭 이런 걸 확인받아야 마음이 편해. (능청스럽게 웃으며 네 어깨에 기댄다.) 짐작으로 느끼는 거랑 말로 듣는 거랑 다르잖아.
양사비의:……이런저런 사건도 많았고, 방학 초반에는 크게 놀라기도 했고. (아, 행복감에 겨워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잠깐 잊을 뻔 했다. 낯이 굳었다가 힘 없는 웃음이 번졌다.)
그래도…… 즐거웠어. 즐겁고 낯설고 이상했어. 나한테 일어날 거라고 예상 못 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거든.
위림:그건…… 미안. 딱히 너까지 엮이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네 머리를 가볍게 쓰담는다.) 그래도, 예상 못한 일도 겪어보니까 나쁘지 않지? 첫 키스라던가, 첫 애인이라던가……
어때. 나랑 있는 거, 행복했어?
양사비의:행복했어. (그것만큼은 명확했으니, 대답에 망설임이 없다.)
많이 행복했어.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했어.
위림:(바라던 이야기다. 네가 나로 인해 행복하고 즐거워하고……. 아무 표정도 없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이 꿈만 같다. 이 감정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기쁘다.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이라는 걸 확인할 때마다 마음 한쪽에서 행복과 안도가 차오른다. 품에 안겨있는 몸을 힘주어 안는다.) 다행이다, 너도 행복해해서.
나도 많이 행복했어. 살면서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앞으로도 이만큼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치. (고개를 들어 너와 이마를 맞댄다.)
양사비의:……너랑 영원히 이렇게 방학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빨리 개학했으면 좋겠어. (조용하게 웃었다.) 같이 학교 다니고, 같이 졸업하고, 또 같이 어른이 되고 싶어.
위림:졸업하면서 서로 단추도 주면 되겠다. 이참에 대학도 같은 곳으로 갈까? 입학하자마자 CC로 소문나는 거야. 그러면 다른 과여도 누가 너 눈독 들이는 일 없을 것 같은데. (시시덕댄다.)
양사비의:같은 대학 올 거야? 개학하면 수업도 열심히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할 거야?
위림:그건…… (갑자기 현실적인 얘기가 닥쳐오니 할 말이 없다. 입막음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입 맞춘다.) …아, 알아서 할게. 어떻게든.
그치만 방법이 그거밖에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너랑 같이 열심히 듣고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목소리가 작아진다.)
양사비의:(쪽, 짧은 입맞춤이 입막음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다.) ……
같은 대학교 다니고 싶다. 그게 아니면 아주 가까운 대학교. (머릿속에는 오로지 이 생각 밖에 없기 때문이다. 손을 들어서 네 뺨을 조물거렸다.) 누가 날 눈독 들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너한테 관심 갖는 게... 싫을 것 같아.
너는 지금도 가끔 길 걷다가 번호 따이잖아. 나 다 알아.
위림:…… (가만히 쳐다본다. 질투하는 것마저도 이리 귀여울 일인가. 다시 한 번 입 맞췄다.)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가 나 쳐다보거나 관심 보이면 질투나?
양사비의:…… (침묵이다. 여태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너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이제 그런 장면들을 다시 맞닥뜨렸을 떄 무심함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 당연한 거 아니야?
위림:(아, 욕심내고 있다. 타인을 질투하고, 날 원하고, 날 바라고 있어……)
(다문 입술 새로 웃음이 샌다. 자꾸만 비집고 나오는 걸 참지 못하고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만다.) 나 네 거야. 그래도?
양사비의:내 거…….
위림:응, 네 거.
양사비의:(다시 말한다. 네 팔을 품에 가볍게 안는다.) 내 거.
위림:네 거야. (따라 다시 얘기한다. 정수리에 고개를 묻는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오로지 네 거.
양사비의:그러니까 같은 대학이나 가까운 대학 가는 거야. (머리 윗쪽의 무게가 사랑스럽다. 시선을 앞에 두면 절 바라보는 검은 고양이가 있다. 그제서야 다시 절절하게 깨닫고 만다. 아, 나 네가 너무 좋다.)
위림:알았어. 나 공부 열심히 하고 수업도 잘 듣고, 학교도 안 빠질게. 이거 엄청 큰 마음 먹은 거야. 알지? (남은 한 손으로 네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같은 대학에 가 손을 잡고 같이 걷는 풍경을 그려본다. 얼마나 행복한 삶일까.) 너도 내 거니까 나 열심히 도와줘야돼.
양사비의:응. 알지. (눈에 힘을 주고 수업을 듣는 널 상상하면 벌써부터 왜이렇게 즐거운지 모르겠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어떻게든 필기를 하려고 하려나, 아니면 결국 포기하고 엎어져서 잠드려나.)
열심히 도와줄게. 정 안되면…… 하향지원 하지, 뭐.
위림:……진짜? (그럼 좀 덜 열심히 해도 되지 않을까? 잠깐 혹했다가 곧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여자친구 발목 잡는 남자친구는 최악이야. 그런 건 안 될래.
매일 너네 집에서 너한테 과외받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럼 연애하느라 공부는 못하고 하루종일 붙어있으려나. (그럼 연애도 그만해야 하는 건가…? 그건 싫은데. 그치만 네 옆에서 멀쩡하게 공부만 할 자신은 없다. 근심만 깊어지다가 생각을 떨쳤다.)
그래도 재밌겠다, 너랑 같이 공부하는 거.
양사비의:그러게. 그것도 다른 의미의 데이트겠구나. (창 밖을 바라보면 노을의 붉은 빛에 저녁의 보랏빛이 뒤섞여 참 장관이 펼쳐졌다. 그것에 잠깐 시선이 빼앗겨 말소리에 공백이 생긴다.)
(이 약속, 기억해 주겠지. 지금의 이상현상이 멈추고, 게임이 전부 원래대로 돌아가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간대도 말이다. 뒤이어 눈동자를 굴려 너를 올려다본다.) 있지, 지난 번 시험 성적은 어땠는지 물어봐도 돼?
위림:……지난번 시험? (네 시선이 향하는 대로 제 눈동자도 움직였으니, 자연스레 너와 시선을 맞추게 된다. 아무리 과거를 되짚어봐도 시험지를 채점하지도 않았고, 성적표를 제대로 본 적도 없으니 기억할 리가 없다. 하얀 눈동자를 바라보는 낯에 옅게 곤란한 기색이 어린다.) 흠, 그러니까……
대충 한 40점정도 받았나, 35점인가…… 57점짜리도 하나 껴있던 것 같은데……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형편없지? (결국 시선을 피해버린다.)
양사비의:그래도 그 정도면, 기본 점수는 다 챙긴 거 아니야? (그것보다 더 낮은 기준을 세우고 있었던 건지, 목소리의 기색이 나쁘지 않다.)
공부 조금만 하면 바로 좋아지겠다. (손을 위로 올려 뺨을 살짝 매만졌다가 내린다.)
개학하고 나서는 주말에도 많이 만나자. 카페도 좋고 집도 좋아. 노는 건 이번 봄방학으로 끝. (문장과 문장 사이에 쉼을 둔다.) 괜찮지?
위림:(그전엔 10점짜리 시험도 있었다고 말 못 해. 이건 평생 묻어둬야지. 시선을 피할 때는 언제고, 꽤 괜찮은 대답이 들려오자 다시 능청스럽게 미소짓는다.) 나,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네가 좀 도와주면 금방 성적 오를걸.
그래도… 주말엔 놀면 안 돼? 평일에 열심히 할게. 갑자기 공부만 열심히 하면 역효과 날지도 모르고. (네 손을 끌어다가 다시 제 뺨에 얹는다. 손바닥에 가볍게 부비적거린다.) 안 돼?
양사비의:토요일에는 공부하고, 일요일에는 노는 건? (그대로 손을 오므렸다. 손끝마다 네 뺨의 동그랗고 부드러운 겉면이 느껴져서 좋았다.)
위림:……쉬는시간 있어?
양사비의:당연하지. 안 쉬면 힘들잖아.
쉬는시간에는 잔뜩 뽀뽀하고 연애하자.
위림:알았어. (손바닥에 다시 뺨을 부볐다.) 약속이야. 잊으면 안 돼. (네 기억 안쪽까지 집어넣으려는 것처럼 지긋한 어조였다.)
까먹고 공부만 왕창 시키고 돌려보내면 드러누워서 울 거야.
양사비의:(이렇게 이상하게 흘러가는 나날, 돌아가지 않는 세상, 그래서 너와 내가 예상하지 못한 미래를 손에 얻게 된다면……. 아,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미래가 갖고싶다. 미래가 너와 내게 허락되었으면 좋겠다. 게임은 싫다.) 응. 약속할게.
그래도 같이 공부한다는 명분으로 우리 집에 눈치 안 보고 막 놀러올 수 있잖아. 그건 좋지 않아? 삼촌도 딱히 의심 안 할 걸?
위림:우리 둘이 방에서 뭘 해도 공부하겠거니, 하고 생각하시겠지? 그건 좀 좋다. (수많은 가정을 하고, 너와 나를 그 속에 집어넣어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난다. 함께할 나날들을 그리는 게 즐겁다.)
너랑 하는 거면 정말 뭐든 다 좋아져버리네. 공부하러 가는 건데도 좋겠다는 생각만 들어. 평생 함께하면 얼마나 행복해질까…….
분명 살아가는 것도 엄청 즐겁고 재밌겠지? 기대된다. (짙게 웃어 눈매가 접혔다.)
양사비의:림, 나 이상한 소리 하나만 할래.
있잖아, 갑자기 세상이 두 쪽이 나서,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어쩔 수 없을만큼 거대한 재앙이 닥쳐서, ……
만약 이렇게 보냈던 봄방학을 전부 잊는대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그걸 꼭 기억해. 알았지?
위림:(뭐야, 또 무슨 얘기 하려고. 장난스럽게 말하며 웃던 낯이 서서히 굳어간다. 시덥잖은 농담이나 던지고 평소처럼 웃어야 되는데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뭐야, 그게… (몇 번을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어도 그새 사그라든다. 결국 표정을 잃은 낯이 천천히 아래로 기운다. 수많은 말이 목구멍을 막아 아려온다. 차라리 잊고 싶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림자 내린 시선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야경으로 향했다가, 천천히 네게로 돌아온다.)
진짜 이상한 소리 하네. (차라리 도망치고 싶다. 둘만 있을 수 있는 세상으로. 이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으로. 그러나 그 대신 너를 제 품에 껴안고, 그대로 고개를 품에 파묻어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한다. 어떻게든 웃으려 한 탓에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도 약속해줄 수 있어?
양사비의:약속할게.
(네 품에 파고들어 웅얼거리는 소리로 말한다. 그럼에도 네게만은 이 약속이 단단하게 닿아야 하니까, 발음이 뭉개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이전처럼 네가 다른 사람을 보게 된대도,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양팔이 네 허리를 감아 단단하게 끌어안는다.)
(품을 비집고 나와서 네 낯을 본다. 아, 이렇게 어색한 얼굴은 또 뭐람. 누가 봐도 억지로 웃고 있기에, 그 모습이 안타까워 바람 새듯이 웃는다.) 대신에 너도 약속 하나 해. 어떤 일이 생겨도 네 인생에서 이 봄방학을 제일 아름답게 생각할 거라고.
위림:보지 마. 이런 얼굴이 뭐가 좋다고……. (시선이 마주치면 놀라 겁먹은 아이마냥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린다.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 자꾸만 머리 안쪽으로 들이닥친다. 생각하기 싫어도 생각하게 되고 어쩔 도리 없어 직시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도피처가 되어주었던 게 너라서, 네 애정 하나에 빌어먹고 살던 삶이라서 결국 다시 시선을 맞춘다.)
(어느 때든 너와 마주보고 있으면 뭐든 괜찮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새하얀 눈동자를 볼 때마다 자신을 덮치는 지난함은 없어지고 오롯이 너랑 함께하는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그래, 우리는 언제까지나 서로를 사랑하면서, 영원히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보고 있을 거야. 언제나…….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다시 평소의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응, 약속할게.
사실 이렇게 약속하지 않아도, 난 이 봄방학만 생각하면서 살 수 있어.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때가 또 있을 리 없잖아……
양사비의:그거면 됐어. (그거라면 설령 이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서 네가 다른 사람을 지켜본대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주인공'이 무얼 해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거니까.)
(봄방학을 잊게 된대도 네 울림은 내 가장 깊은 곳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목석처럼 변해도 가장 행복하고 충만한 엑스트라가 될 게 분명하다. 가장 특별하고 가장 기이한 엑스트라. 유일하게 주인공을 이긴 엑스트라.) 그거면 정말 다 됐어.
아, 한 바퀴 다 돌았다. (직원이 이렇게 맞닿은 모습을 보기라도 할까봐, 한껏 수줍은 낯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멀어진다.) 인형이랑 짐 챙겨서 내리자.
위림:(그 무엇도 이 봄방학을 이길 수는 없을 테고, 그렇기에 더 잃기 싫은 때다. 기쁠 때마다 그만큼의 불안을 헤아리는 버릇은 여전해서, 다시는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멀어지려는 몸을 마지막으로 한 번 껴안고 놔줬다. 남들이 보기에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둔 대신 한 손은 네 손을 잡은 채다.)
(직원이 관람차 문을 열어주면 앞에 놓인 인형을 챙긴다. 맞잡은 손에 온기가 들기 시작하면 곧 상념은 사라진다. 관람차 밖으로 나선다.)
금방이라도 별에 닿을 것처럼 올라간 곳에서 보았을 땐 자그마한 빛이 반짝였는데, 내려와서 보는 풍경은 또 사뭇 다릅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눈부시게 반짝입니다.
이대로 타올라 없어질 것처럼 한껏 빛나는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원래 놀이공원은 마지막일수록 반짝이고 즐겁다고 하던데, 관람차 근처에 우뚝 솟은 시계를 보니 곧 폐장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위림:이제 문 닫을 때 됐네. 슬슬 가야겠다.
자, 출구는 이쪽. (웃는 모습이 여상스럽다. 붙잡은 손을 당겨 앞서는 대신 속도를 맞추어 걷는다.)
양사비의:(품에는 인형이 된 네가 있다. '미니 위림'을 끌어안고, 남은 손으로 네 손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관람차가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해가 이렇게 져버리는 건 치사한 것 같다. 조금 더 오래 떠있어줄 수도 있는 거잖아.) …….
응. 돌아가자. (조용히 웃고는 너와 속도를 맞춰서 걷는다.)
반짝이는 놀이공원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덜컹이는 지하철에 몸을 실은지 얼마나 됐을까요?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쁘게 논 탓인지,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여기에서 잠들어버리면 안될 텐데, 돌아갈 때 위림을 곤란하게 하는 짓일 텐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머리 위를 쓰다듬는 손이 있습니다.
위림:괜찮아, 비의야. 눈 감아도 돼.
다정한 말과 함께 조금씩 고개가 기울어집니다.
잠에서 깨야 하는데, 이겨낼 수 없을 만큼 졸립니다.
위림이 어깨를 대주는 것 같은 느낌을 마지막으로 온몸의 감각이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이 기분은 분명 꿈결을 헤매고 있는 거겠죠…….
비의, 정신력 판정!
양사비의:
정신
기준치: 80/40/16
굴림: 68
판정결과: 보통 성공
불투명한 의식 사이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립니다.
앞에서 먼저 걷고 있는 걸까요?
왠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습니다.
한 번 따라가 보는 게 좋겠습니다.
양사비의:(꿈? 꿈이 아닌가? 몸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그 몽롱한 감각을 밟아가며 상대를 따라갔다.)
천천히 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이곳은 익숙한 길입니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학교에서부터 집으로 돌아갈 때는 꼭 이 길을 통해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머잖아 보이는 집은 당신의 익숙한 흰색 지붕의 2층 집이 아닙니다.
허름한 주택과 그 대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보입니다.
이번에는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양철 대문 너머로 집을 바라보던 타인이 말합니다.
위림:여기가 네 집이었구나….
헷갈릴 수 없는 목소리입니다.
위림은 잠금장치도 없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이어지는 문을 하나 더 열더니 안으로 들어갑니다.
거실 한 가운데에 누워있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가구 하나조차 놓여있지 않은 공간에서 홀로 누워있습니다.
위림은 그 곁으로 다가가서는 자리에 앉아 마치 죽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일자로 누워있는 몸을 응시합니다.
창 밖은 어두컴컴하기만 한 밤입니다.
벚꽃이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달빛이 밀려듭니다.
그림자 진 낯이 망연히 중얼거립니다.
위림:……이상하지 않아?
나는 왜 원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사랑을 줘야 하고, 너는 왜 스쳐 지나가는 배경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우리의 고통을 말하며 일그러진 웃음을 내뱉다가도, 당신이 잠에서 깨어날까 숨죽이며 어깨를 떱니다.
위림:어째서 이런 세상에서 태어나야만 했던 걸까…….
차라리 다 없애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나, 나는…… 매번.
그래도 이번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이런 적은 없었어. 정말,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어.
이번에야말로······.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가 뜬다.)
내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너에게도 기회가 주어져야 해. 그게 맞지?
그렇지 않으면……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이 희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했을까요?
정원을 무성히 채우고 있던 잡초가 사라집니다.
서서히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잘 정돈된 풀밭이고, 가장자리의 정원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노란 꽃송이입니다.
곧 고개를 든 위림은 허공을 바라봅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창'이 있고, 그 위를 손가락으로 누르고 건드리는 것 같습니다.
위림:집은… 2층 집으로 할까? 잘 보이게 흰 지붕으로.
나랑 소꿉 친구 사이여도 좋겠다. 그럼 아주 오래 전부터 함께한 것 같을 테니까.
정원에는 노란 꽃이 지지 않을 거야. 언제나.
한 번의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손가락 끝이 움직일 때마다 풍경이 바뀝니다.
단출했던 집에 구색이 생기고, 존재하지도 않던 안방의 문이 생기고…
거실에는 푹신한 소파와 큰 TV가 놓입니다.
마법처럼 모든 것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는 건 오직 단 한 사람입니다.
깊이 잠들어있는 당신의 머리맡을 지키는 친구가 말합니다.
이 세상의 선택을 받았고, 사랑할 운명이 정해졌고, 완벽한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위림이 속삭입니다.
위림:좋은 꿈 꿔, 비의야.
너는 이제 엑스트라가 아니야.
시야가 멀어집니다. 꿈에서 깨어나려는 걸까요?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가장 특별한 것을 대하는 듯한 목소리는 좀체 잊히지 않습니다······.
◼◼◼ 1D50 상승합니다!
양사비의:47
Chapter 6. 안녕, 새하얀 봄의 로맨스
익숙한 곳에서 두 눈을 뜹니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방 안입니다. 익숙한 침구가 아니었다면 꿈과 혼동했을지도 모릅니다.
창밖에서는 새카만 밤에 아로새기듯이 하얀 꽃잎이 흐드러집니다.
어떻게 위림이 집에 오는 길에서부터 당신을 옮겨주었는지는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꿈에서 본 풍경은 망상이 아닙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더라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위림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은 직감이 차오릅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위림을 찾으러 가야 합니다. 어디에 있을 것 같나요?
양사비의:(눈을 뜬다.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찾았다. 네가 나를 위해 세계를 다시 축조하였기에 너를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주인공을 죽였기 때문도 아니고, 네가 세상의 법칙을 전부 어그러뜨렸기에 찾아야하는 것도 아니다.)
(왜 하필 나였는지, 왜 하필 나를 위해서 그랬는지. 그 이유를 묻고싶었다. 휴대폰이 주변에 있을까?)
마침 휴대폰은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양사비의:(휴대폰을 들어 당장 네게 전화를 건다.)
뚜루루…… 신호음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기계음이 흘러 나옵니다. 받을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양사비의:(메신저로 문자를 남긴다. '너 지금 어디야?')
(그 문자를 보내자마자 바깥으로 뛰쳐나온다. 제 방을 뛰쳐나와 거실로 내려간다.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곳에서 잠들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괜한 희망을 품는다.)
내려가본 1층은 컴컴하고 텅 비어 있습니다. 소음 하나 들리지 않네요.
양사비의:(신발을 우악스럽게 신고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림!
(너는 네 집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쪽에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모르겠다. 어디에 있을까? 발길이 닿는대로 내달려 학교로 향했다.)
(세상의 단순한 엑스트라였던 나는 아는 장소가 그렇게 많지 않다.)
학교에 도착하자, 원래라면 잠겨있어야 할 교문이 열려 있습니다.
위림의 짓일까요?
양사비의:(교문을 지나쳐서, 그대로 옥상까지 올라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옥상.
모든 것이 시작된 곳입니다.
목격했을 때부터 상황은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윤리관이 뒤엉키고, 당신을 이루고 있던 세상이 뒤바꼈습니다.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난간 밖으로 사람이 떨어졌는데도 평소처럼 웃던 위림까지······.
여전히 그 모습만 떠오르나요?
과연 그 옥상이 여전히 주인공의 비극만으로 느껴지나요?
분명 아닐 겁니다.
이번에는 당신이 그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벚꽃은 땅을 겉돌고, 밤하늘은 새카맣습니다.
옥상의 문을 열어젖힌 순간, 경악한 낯의 위림과 그 뒤의 분홍색의 이질적인 '팝업창'이 보입니다.
위림이 떨림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 목소리는 얼핏 애원을 닮아있습니다.
위림:비의야…, 부탁이야. 뒤돌아서 나가면 안 돼?
양사비의:(팝업창에 무엇이 적혀있는지 읽으려한다. 림의 말은 잠깐 제쳐두었다.) 싫어, 안 갈거야.
위림:……
그럴 줄 알았어. 넌 억지로 움직일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네가 저 문으로 밀려나도록 할 순 있어.
■■■ Roll
기준치: 0/0/0
굴림: 29
판정결과: 실패
(이상한데, 다시 한 번.)
시스템 Roll
기준치: 0/0/0
굴림: 21
판정결과: 실패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요?
당혹을 느낀 것은 위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스템 작동이 실패하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지, 한참이고 손바닥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듭니다.
깨달음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는 목소리입니다.
위림:그렇구나, 그렇게 된 거구나……
네게로 갔어, 시스템 제어권. 방학 새에.
위림은 당신을 바라봅니다.
밤하늘 아래, [이 게임을 삭제하겠습니까?]라는 팝업창을 등진 채로.
그림
위림:……미안해, 이런 선택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서. 아무리 생각해도 견딜 수가 없었어……
양사비의:무얼?
무얼 견딜 수 없었길래.
뭐가 견딜 수 없었길래.
위림:네가 사라지는 거.
다 잊고 예전의 배경 같은 때로 돌아가는 거……
양사비의:……못 돌아가게 할 수는, 없어?
그런 방법은……
아무래도 없겠지. 그치.
이건 그냥 게임이니까. (말을 이어가는데, 그제서야 제 주제가 자각이 된다. 네가 안겨준 특별함에 취해서 이런 식으로 뼈저리게 느끼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위림:……밖에선 주인공이 죽는 오류가 생겼으니까 점검하고 있을 테고, 슬슬 수정이 끝나가고 있을 거야. 다른 선택지 같은 건 없었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 (맥빠진 미소를 지었다.) 그쯤 되니까 너랑 어른이 될 수 없고 함께하지 못할 바에야, 그냥 이대로 끝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도 그 전까지는 너랑 같이 있고 싶었어. ……
양사비의:……
림. 있잖아……
시간이 다 되기 전까지만, 안고있으면 안 돼?
위림:……. (쥐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다본다. '바보 여자친구'의 부재중 알림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받는 거였는데…… (꼭 울음을 참는 듯이 일그러진 낯으로 겨우 웃는다. 팔을 벌렸다.)
양사비의:(네 품안으로 뛰어들어간다. 꼭, 아주 예전부터 그 품이 자기를 위해 예비되었다는 듯.)
고마워, 사실 이 얘기부터 해주고 싶었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선택해줘서 고마워.
내가 특별하다고 얘기해줘서 고마워.
난 특별해. 네가 사랑해줘서…… 정말 특별해졌어.
위림:(품이 자리를 찾은 것처럼 편안해진다. 품안에 안겨오는 몸을 힘주어 강하게 안았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너만 특별해.
난 너만 사랑하고, 내 세상에서 네가 제일 특별해…… (자신보다 조금 낮은 네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네가 내 주인공이야.
양사비의:……. (관람차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나는 다시 단순한 폴리곤으로 돌아간대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만 불변하며 존재한다면 얼마든 괜찮을 것 같았다.) 시스템이 다시 복구되면…… 너는, 너는 어떻게 돼?
다시 다 처음부터 돌아가는 거야? 아니면…… 혼자서, 전부 기억해야해? (그런데, 나는 나를 걱정하지 않아. 다만 네가 걱정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날 보고 네가 지을 표정들이 나를 너무 아프게 할 것 같아서. 네가 홀로 되새길,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가 널 괴롭힐까봐. 울음 가득한 낯으로 널 바라본다. 양손이 네 뺨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위림:(차라리 울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눈을 깜빡여봐도 흐르는 건 없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흐느낌과 함께 네 손바닥 안에 뺨을 기댔다.) 넌 기억 안 나겠지만…… 그전에도 이런 적이 있어. 물론 그때도 기억하고 있고.
그때 기억만 잃고 돌아온 것도 다행이었지. 이대로면 넌 또 다 잊어버릴 거고, 나랑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다 까먹을 거야.
하지만, 계속 반복되면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몰라. 기억만으로 끝나긴 할까?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가버리면? 또 표정 없이 가만히 앉아있다가, 아무도 없는 집에 눕고, 동이 트면 다시 학교에 가는, 그런…… (아, 다시 기억이 범람한다. 네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던 때가. 나랑 했던 약속도 잊고, 다녔던 곳도 잊고, 같이 보낸 시간도 다 사라져버렸던 그 '처음'이……)
(토해낼 수 없는 울음이 목을 막는다. 벅찬 숨을 간신히 고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배경같은 때로 돌아가면, 난 못 참아. 못 견뎌.
너 없이 지내는 방법 같은 건 몰라, 이제……
양사비의:……… (그 처절한 고백이 끝나면,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네 몸을 꽉 끌어안는 것 뿐이다. 이거 봐. 난 배경이 아니야. 이렇게 사지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네 체향도 맡을 수 있어. 너와 강하게 포옹을 나누면서 체온을 나눌 수도 있어.)
나는 그 때의 기억만 있으면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되겠다, 이거. (울음이 멈추질 않아서, 눈가가 그 사이에 붉게 무르고 콧물도 흉하게 흐른다. 소매로 얼굴을 벅벅 닦다가 흐리게 웃는 시늉만 했다.)
네가 괴로운 거, 상상만 해도 싫어.
네가 힘든 거…… 그게 더 싫은 것 같아. 우리한테는 망각도 죽음도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널 두고 나만 예전으로 돌아가.
여기서 끝내자. 그게 우리 최고의 해피엔딩인 것 같아.
위림:(있잖아, 사실 차라리 네게 돌아가지 않는 게 좋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어. 그럼 나도 더 이상 널 그리워하면서 상처입지 않아도 되고, 너도 예비된 아픔이 없을 테니까. 차라리 그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애한테는 절대,) 사랑해. (하고 말할 수가 없었어.)
(나는 네 애정에 빌어먹고 살았고, 내 애정은 오롯이 네 것이니까. 너도 날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네가 제일 특별하다는 말에 기뻐해줬으니까, 널 선택해줘서 고맙다고 했으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내가 돌아갈 곳은 오로지 너 하나 뿐이게 되었고, 그래서 또 돌아온 거야.)
비의야.
나 사랑해?
양사비의:사랑해.
그래, 고마울 게 하나 더 있었다.
사랑이라는 게 뭔지 가르쳐줘서 고마워.
위림:그때랑 또 똑같은 말 하네. (일그러져있던 낯으로 겨우 웃었다.)
나는 항상 이 말이 듣고 싶었거든. 네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때도 사랑해, 알려줘서 고마워, 하는 목소리 하나로 여기까지 왔어.
그래도, 이렇게 끝나니까…… 기뻐, 나는.
이대로 끝난다는 사실이 더없이…… (안고 안겼던 몸에 힘이 빠진다. 온전히 네 품에 기대어 안겼다.)
양사비의:마지막 스크립트는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글일거야. (많은 것들이 각오되었다. 이 오류를 수정해나가는 무언가는 너와 내가 열렬히 사랑했음을 알아주겠지.)
엔딩 크레딧에는, 우리 이름이 제일 위에 올라올 거고.
그 다음 에필로그에서는 너와 내가 대학에 다니는 모습이 비춰지겠지.
그런 게임이야. 사랑해. 림.
정말, 정말……
정말 많이 사랑해.
양사비의:(게임을 지운다. 안녕, 림. 안녕, 내 바보 남자친구. 또 안녕, 내 미래의 바보 남편.)
■■■ Roll
기준치: 100/50/20
굴림: 82
판정결과: 보통 성공
분홍색의 팝업창 위로 손가락 끝을 대 이 세상을 삭제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게임을 완전히 끝내고 싶어한다는 말에 어째서 수긍하였을까요.
엉망진창이었던 설득을 이해한 것도, 지리멸렬한 고백이 좋았던 것도 아닙니다.
망각도, 죽음도 없는 삶에서 모든 것을 떠안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사라지는 것보다 더 괴로운 탓이었을까요?
세상이 뒤흔들립니다.
새카만 하늘은 산산이 부서져 아주 조그마한 조각이 되어 바스러집니다.
발끝에서부터 아주 서서히, 느린 속도로 이 세상은 멸망하고 있습니다.
데이터는 픽셀이 되어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위림은 당신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놓지 말아달라는 듯 품에 파고듭니다.
그토록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순간입니다.
위림:왜 이렇게 살아야 될까, 왜 이런 삶인 걸까, 몇 번을 생각하고 또 궁금해했는데……
이제 다 괜찮을 것 같아.
우리, 이대로 영원히 행복할 거니까. 그치?
사랑해, 비의야.
아주 많이, 정말로……
사랑해.
이 이상 잊히는 게 무서웠던 장난감 나라의 임금님은 멸망을 바랐습니다.
지금 남기는 모든 말은 유언이 될 것입니다.
이 유언은 영원할까요, 아니면 잊혀졌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사라지게 될까요?
행복했던 기억과 마지막 말들을 품은 채 영영 멈춰버린다면, 이 또한 또다른 영원이 아닐까요…….
옥상의 벽면이 갈라지고 가루가 되어 떨어집니다.
조각마다 0과 1로 이루어진 땅의 유성이 되어 떨어질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다른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우리에게도 다른 사랑을 할 기회가 찾아올까요?
자, 눈을 감을 때입니다.
두 사람, 이제는 같은 꿈을 꾸어요.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ENDING 3│ 멸망하는 세상의 마지막 로맨스